생강 긴 글 #49 - 봄의 그림자

내 모습은 화려한 케이크 위에 다 타고 남은 초 같았지

by 생강

49.


아주 다채로운 멸망, 발랄한 죽음, 또렷한 붕괴.

봄이 왔다.


맑은 하늘 아래 피어난 꽃을 보며 봄은 봄이구나, 나는 메말라 가는데 봄은 봄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비처럼 쏟아지는 벚꽃과 흔들리는 개나리, 발목 언저리에 살랑살랑 내려앉는 목련이 봄을 증명했고 검은 바지를 입은 나는 그날따라 그림자 같았다. 봄의 그림자. 모두들 봄을 만끽하는데 나는 납작해진 감정으로 공원을 질주했다.

나는 우연처럼 태어나 거짓말처럼 살고 있다.

햇살을 적시고 있는데 마음이 축축하다.

마르지 않아도 될 마음은 메마르고 말라야 할 마음엔 습기가 가득하다.


근처에 유치원이 있나 보다.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두 줄로 서서 세 명의 선생님을 따라 삐약 삐약 걸어간다. 비둘기를 내쫓다가 다가오는 강아지에게 시선을 빼앗겨 선생님들이 손뼉을 치며 앞으로 걸어가자고 다정하게 말한다. 눈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유유히 지나간다. 노부부가 손을 잡고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간다. 햇빛이 내린 자리가 촉촉하게 빛난다. 구름의 가장자리가 햇빛에 데어 투명해진다. 가벼운 러닝화를 신고 질주하는 사람들에게서 바람 냄새가 난다. 유아차를 끌고 나온 부부가 나무 아래서 아이의 사진을 찍는다. 꼬리가 사랑스럽게 말린 하얀 강아지와 몸집이 작고 목청이 큰 강아지가 서로를 탐색하더니 작은 아이가 몇 번 짖고 견주들은 순간 친해졌다가 멀어진다. 벤치에 앉아 인상을 쓰고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화면을 누르는 중년의 여성이 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벤치에 어깨동무를 하며 반쯤 누워있는 중년 남성이 있다. 꽃을 찍고 서로의 사진을 찍는 젊은 여성과 남성이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새소리가 부드럽게 섞인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걸었다.

봄이었다. 모두 봄에 살고 있었다.

모두 나보다 밝은 옷을 입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이 왔을 때 알을 깨고 나온 생명처럼 새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나의 예측은 언제나 빗나갔고 봄은 다만 계절일 뿐 나를 구원할 순 없었다. 공원에서 홀로 겨울에 머물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모습은 화려한 케이크 위에 다 타고 남은 초 같았다. 얼렁뚱땅 꽂혀있긴 하나 쓸모는 없는 장식 같은 것. 마음이 타들어가서 새소년의 <난춘>을 재생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이어지는 동안 귓구멍을 타고 부서지지 말자는 가사가 재생되었다.

봄은 참 특이해. 날 이렇게 바보로 만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죽을 만큼 추웠다가 다시 나타나서 날 뒤흔들어. 봄이 왔는데 나는 그대로여서 따뜻하고 슬프다.


나는 겨울 뒤에 숨어 있다가 봄이 내린 핀 조명에 맞아 질식하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안전하고 지루한 강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