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니까 모른다고 말하는 거지
60.
모른다고 말하는 건 겁이 나. 모두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겠지? 똑쟁이는 아니지만 바보는 싫은데.
나는 나의 결점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게 싫다. 그래서 몰라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고 때로는 모른다고 당당히 말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저런 능력이 없는데, 나보다 저 아이가 사랑받는 것 같네.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야. 나는, 나는 그런 면이 없어서 가끔 외롭고 씁쓸했다. 그런 탓에 어린 시절도 똑쟁이라는 별명에 집착했나 보다. 이미지에 맞게 행동했고 모르는 건 아는 척, 아는 건 더 아는 척을 하며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엔 친구와 나란히 보건실로 가는데 나는 손가락인가 손바닥인가를 다쳐서 갔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는 팔에 난 여드름 같은 것이 따갑고 쓰라려서 왔고 보건 선생님은 앞에 놓인 표에 학년과 반, 이름, 다친 곳, 증상 등을 적으라고 말했다. 나는 손 다침인가 손에 상처라고 적었고 친구는 조금 고민하더니 삐뚤빼뚤한 글씨로 두 글자를 적었다.
모름? 모름이라는 병이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모른다고.
뭐를.
여기 난 거, 몰라서 모름이라고 적었다고.
그 친구는 당당하게 모름, 이라고 적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치를 봤다. 몰라도 대충 아는 것을 적어야 하지 않나? 정말 모른다고 적은 거야? 그래도 되나? 선생님이 모름이 뭐냐고 비웃으시는 거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선생님이 발라주는 연고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치료가 끝난 나는 뒤쪽으로 빠졌고 친구는 쌤, 저 여기 뭐가 났는데 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모름이라고 적었는데. 그런 말을 서슴없이 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선생님은 그래, 그러려니,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표정으로 친구의 팔을 잡고 여드름인지 물집인지 벌겋게 부은 이상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일단 약 줄 테니까 먹고 뭐라도 발라줄게. 팔 여기 올려봐. 선생님은 덤덤하게 말했고 보건실의 분위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만 긴장한 채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적어야 된다는 생각에 이름을 적는 칸에도 내 이름 세 글자가 삐져나오지 않도록 작고 정갈하게 썼던 것이 떠올랐다. 똑 부러진 아이, 나는 손을 다친 것보다 선생님에게 야무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욕망이 더 중요했던 거다. 아직도 그때 그 보건실의 노르스름한 커튼과 붕대에서 풍기는 연고 냄새가 생생하다. 모르면 모른다고 적어야지,라고 말하던,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의 당당한 말투만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도 돼.
어쩌면 그때의 내게 필요했던 건 그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르겠다. 똑똑하고 야무진 줄 알았더니 아니구나? 그런 말이 나를 옥죄어온 것을 단번에 풀어줄 열쇠 같은 말. 모른다고 말하는 건 나의 약점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를 크고 따뜻하게 안아줄 한마디. 나의 무지를 나는 견딜 수 없었고 그런 내게 더 나은 방법을 알려줄 어른을, 나도 모르게 갈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보건 선생님의 덤덤한 태도와 명랑했던 친구의 태도가 여전히 툭 하고 떠오른다. 다 큰 어른이 된 지금의 나를 울린다.
나는 나의 무지를 깨닫고 당당하게 그것을 꺼냈으면, 그런 방식으로 살았으면 지금보다 더 많이 알고 배우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게 무서워서 말하지 않던 아이는 몰라도 용서가 되는 나이를 훌쩍 넘어버렸다.
다쳤으니까 보건실에 가는 거지.
무슨 병인지 알면 왜 가냐.
모르니까 모른다고 말하고
모르니까 더 아는 사람한테 진찰받는 거지.
모를 수 있었던 시절을 떠나온 내가 밉다. 커튼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약품 냄새가 코에 닿았던 그때, 상처를 적는 칸 위에 ‘칼에 베임’이 아니라 “쌤, 어디서 다쳤는지 모르겠는데 피나고 아파서 왔어요. 여기 뭐라고 적어요?”라고 물어볼 용기가 있었더라면. 선생님은 날 혼내지 않았을 거고 도리어 상처를 먼저 돌봐줬을 텐데. 칼에 베였다고 썼던 이유는 어디서 다쳤는지, 무엇을 하다가 다쳤는지 물어보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하여 내가 어디서 다쳤는지도 모를 만큼 덤벙대는 학생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정말 속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는 얼마나 많은 어른을 속이면서 자랐을까. 그중에 나를 모른 척해준 어른도 있을까. 있다면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부끄럽지만 고맙다. 나를 참아줘서 고맙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게.
그럼 너는 내 손을 잡고
아는 것을 알려주면 돼.
똑쟁이도 아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닌 애매한 나를 견딜 사람에게 꼭 그리 말하고 싶다.
모른다고 말하는 건 이제 겁나지 않아.
내 손을 놓지만 마.
몰라도 된다고 말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