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70 - 수박은 맛있었다

씹어 먹어봐야 아는 거야

by 생강

70.


수박을 샀다. 씨가 많은 수박이 맛있다고 했다. 이번 것은 씨가 적지만 달콤하고 맛있다. 쯔억, 쩍 하고 갈라지는 수박을 보고 씨가 적어서 실망했다가 한 입 먹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온에 둬서 미적지근한데도 달콤한 것을 보니 당장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원하면 달콤함이 배가 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수박을 집어먹었다.


막상 까 봤는데 실망한 거지. 어쩌겠어, 열었으니 해야지.


이게 참 신기하다. 하다 보니 꽤 괜찮은 거야. 진짜 알맹이를 발견한 것처럼. 몸을 박아 문을 부수는 것과 잔해 사이를 넘어 걸어 나가 보는 것. 이 둘은 아예 다른 문제더라. 부딪힌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가야지. 앞으로든 옆으로든 원을 돌든 곡선으로 가든, 가보는 건 또 다른 문제더라. 느낌이 다르다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여름 바람을 맞으며 수박을 씹었다. 후줄근한 잠옷을 입고 어딘가를 응시하며(사실은 생각에 잠겨서) 입으로는 수박을 씹고 손으로는 다음 수박을 집었다. 씨가 적다고 맛없을 거란 생각을 버리자. 물론 맛이 없는 경우가 있지만 이번엔 다르다. 속을 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속을 우걱우걱 씹어먹어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분을 씹는 게 이런 걸까. 수박은 거대하고 촉촉하다. 낑낑대며 수박을 잘라 나눠 담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금방 먹어치운다. 언제 다 먹지, 싶다가도 고개를 돌리면 이미 절반은 먹고 난 뒤다. 처음의 생각과 다르게 사는 내가 익숙하면서도 웃기다.


나의 짐작을 둘로 나눈다면 반은 대부분 틀리고 나머지는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걱정에서 기인한다. 아무래도 완벽을 너무 사랑하는 거지. 허상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젠 과일을 먹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맛있으면 맛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을 꼭 깊이 파고들다가 밤새 생각에 갇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오늘의 생각이 나를 다독였다는 것. 까 보거나 부딪히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을 깨부순 날이었다. 그 뒤의 일은 누구에게 맡길 건가. 아무렴 내가 또 고생하겠지. 그러나 그 길이 완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씨가 적게 보이던 수박이, 냉장고에 넣지 않아서 시원하지도 않던 그 녀석이, 나를 단숨에 경이로운 달콤함으로 이끌었으니. 이렇게 맛있는 수분이 있다니. 매년 여름마다 감탄하는 걸 되새기면서.


씨가 적어도 맛있는 수박처럼, 무기가 없어 보여도 나는 닥친 일을 꽤나 잘 해치우는 사람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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