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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올 Apr 01. 2024

9화.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

 해가 져야만 집 안으로 들어오던 아이들이 참 신기하고 인상적이었는데, 다음으로 신기한 것은 남편이었다. 정말 손바닥만큼 작은 집이지만, 남편이 수시로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 갔는지 불러도 안 보여서 찾아보면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거나 텃밭 작물을 돌보고 있고, 수확한 작물을 다듬어서 수돗가에서 씻고 있었다.     

 아파트에서는 주말이면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고 있던 남편이었다. 놀이터라도 잠깐 같이 산책하자는 부탁조차 잘 들어주지 않던 남편이었다. 하루 종일 밤늦도록 좁은 집안에 울려 퍼지는 텔레비전 소리가 나에게는 정말 스트레스였다.

 “눈꺼풀에 아예 리모컨을 달아라. 리모컨을 달아. 눈뜨면 켜지고 눈감으면 꺼지도록.”

 “암만 봐도 당신은 모니터 중독이야.” 

 라며 잔소리를 해댔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작은 아파트의 큰 방 겸 거실이던 방에서 주로 함께 잤는데, 아이들이 자도록 텔레비전 좀 끄자고 사정을 하면 소리만 살짝 줄일 뿐이었다. 빛과 소리에 예민한 나는 잘 때마다 짜증이 났다. 나는 그 빛과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는데 본인은 그대로 코를 골며 잠든다. 결국 나는 남편이 잠든 후 직접 텔레비전을 끄고 나서야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내 눈에는 정말 모니터 중독자 같이 보였던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달라졌다. 

 주택에 이사 오더니 주말 아침이면 남편은 마당에서 햇살을 받으며 빨래를 널고, 풀을 뽑고,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토끼장도 만들고 닭장도 만들었다. 거뭇해진 도마를 들고나가 대패질을 하기도 했다. 텃밭에서 토마토를 따고 옥수수를 따서 삶았다. 채소를 손질해서 씻어 오기도 하였다.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도 이쁘고, 마당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자잘한 집 안팎의 일을 하는 남편도 이뻤다.      


주말 아침 잡초를 뽑고 빨래를 널고 책을 보는 남편이 너무 이뻐서 카메라를 들고나갔던 일


 게으른 자의 배드민턴 치기

 주말이면 참 웃기는 배드민턴 경기가 가끔 열렸다.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면 아빠는 팔짱 끼고 한가롭고, 아이들 둘이 공을 주우러 열심히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천성이 좀 게으른 남편은 자신 앞까지 날아오지 않는 공에는, 절대 발걸음을 옮기지도 라켓을 갖다 대지도 않았다. 어쩌다 아이들이 친 공이 자신의 라켓 앞까지 치기 좋게 날아오면, 톡 쳐서 보내주기만 했다. 자신의 발 앞에 공이 떨어져도 남편은 절대 허리를 숙이는 법이 없다. 남편은 짝다리 짚고 서 있고, 공을 잘못 보낸 죄로 아이들이 아빠 발 앞에까지 쫓아와서 주워 갔다. 지켜보는 나는 네트라도 걸어주고 싶었다. 나 같으면, 아이들이 치는 짧은 공을 좀 쫓아가서 치는 척이라도 해줄 것 같은데, 바로 앞에 떨어진 공은 본인이 주워서 아이들에게 보내줘도 될 것 같은데, 남편은 절대 다리를 움직이는 법이 없다. 급기야 짝다리 짚고 서서 팔짱까지 끼게 생겼다. 아이들이 주워서 치고 주워서 치고, 어쩌다 길게 날아가 아빠가 받아 쳐준 공은 못 받으니 또 주워서 치고 아이들만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너무 재미있어. 너무 재미있어.’를 연발하며 깔깔거렸다. 어쩌다 아빠가 보낸 공이 라켓에 맞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맞은 것인 마냥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것이 바로 게으른 자의 배드민턴 치기로구나! 이 천하의 게으름뱅이야!"

라며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다. 

 나같이 부지런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배드민턴 경기가 주말에 가끔 있었다. 

 

    


마당이 주는 위로와 행복     

 나 또한 일상이 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을 한 바퀴 돌고 텃밭을 한 바퀴 돌아보고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화초와 작물 가꾸기에 점점 흥미가 붙었다. 시민 단체 활동이 많아 바쁜 남편의 늦은 귀가와 육아 스트레스로 영주에서의 2년 동안 사실 남편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나는 모든 활동과 모임, 친분 관계를 접고 남편을 따라 영주에 왔는데, 나 혼자 내버려 두고 본인은 다른 일로 정신없이 바쁜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물론 개인의 유희를 위한 일이 아니라 시민 단체에서 맡은 여러 가지 역할들을 해내느라 그런 줄 알기에 한편으론 믿음도 있고 이해도 했지만 대구에서 혼자 육아를 할 때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 2년간 이어지자 나는 견딜 수 없이 외로웠고 힘들었다. 육아 휴직 중 한 번은 아이를 업고 집을 나가기도 했다. '돈 떨어지면 돌아오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그렇게 힘들었던 나에게, 마당 생활과 가드닝은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시절을 아이들과 즐기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서, 어쩌다 집에 있는 남편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일도 점점 많아졌다. 함께 벤치와 평상을 만들고 닭장과 토끼장을 만들고, 수돗가에서 이불 빨래도 하고 채소도 함께 다듬어면서 말이다.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나 혼자 버려진 듯한 외로움을 조금씩 달래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당에서 옥수수, 토마토, 참외, 딸기를 따 먹고, 가을이면 고구마도 콩도 풍성하게 수확했다. 마당 수돗가엔 뒷집 대추나무가 반쯤이나 넘어와서 가을이면 탐스러운 대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얼마든지 따먹으라는 옆집 할아버지의 말씀에 맘 놓고 따먹던 싱싱한 대추도 정말 달았다. 늦가을엔 처마 밑에 곶감을 깎아 주렁주렁 달아 놓고 오며 가며 빼먹고, 따로 놀이터에 데려가지 않아도 아이들은 마당에서 흙장난 물장난 소꿉놀이하며 하루 종일 놀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지켜보며 나도 마당의 작물을 돌보고 화초를 가꾸며 맘껏 가드닝을 즐기면서 나의 마음도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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