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지지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재미있는 경험을 하나 했다.
비둘기 두 마리가 인도에 있다가 자전거 때문에 찻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뒤에는 차가 오고 있었다. 차는 비둘기를 보았는지 클락션을 울렸고, 다행히 비둘기가 높이 날아서 치이지 않았다.
나는 바로 옆에서 그 광경을 보았고 멀리, 공원 언덕 귀퉁이로 날아가는 비둘기 두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비둘기가 저렇게 높이 잘 날았었나?’
요즘 비둘기는 사람들 사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걸어 다닌다. 그래서 비둘기가 저렇게 높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이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급박한 상황에 부닥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급박한 상황일 때만 그러한 힘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음.. 정말 그럴까?
급박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먼저 알아채서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갑자기 공자의 말씀이 떠오른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가장 상위이다. 스스로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다음이다. 곤란한 처지에 부딪혀야 배우는(노력하는) 사람이 또 그다음이다. 끝으로 곤란한 처지에 부딪혀도 배우지(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백성들 중 최하위가 된다.”
순서대로 생이지지, 학이지지, 곤이학지, 곤이불학이라 부른다.
나는 저 비둘기처럼 곤란한 상황이 닥쳐야지만, 다시 말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생겨야지만 걷지 않고 날아오르는 곤이학지 타입인 것 같다. 생이지지는 이미 글러먹었으니 학이지지로 도약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학이지지를 하려면 문제를 마주할 만큼 외부의 것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을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게 닥쳐오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에도 벅찬 것 같다.
음.. 정말 그런가? 그냥 변명인가?
그렇다면 시간이 빌 때는 학이지지하는가? 부끄럽지만 거의 그렇지 않다..ㅎ 쉽고 편하게 살고픈 욕망 때문에 계속 늘어진다. 생각하기가 싫고 무지성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30분 동안 철학회 모임에서 평소 생각지 않던 문제를 마주하는데, 정말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런 게 학이지지인가? 사실 학이지지를 개념적으로만 알지 실제로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학이지지는 공자도 힘들어했던 경지라고 들었다. 그러므로 학이지지를 못한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혼자 하는 건 더더욱 힘들고. 결국 복잡한 문제는 혼자 감당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함께 마주해야 하는 것 같다. 내가 학회에 나가는 것처럼, 학이지지를 원하는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학이지지를 해서 내가 얻는 건 뭘까? 이 물음은 '철학을 해서 내가 얻는 건 뭘까?'라는 물음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나는 내게 이익이 되면 노력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내게 필요한 질문이다.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