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가능성을 축소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10월 중에 하려 했던 미술 선생님과의 진학 상담. 선생님께 찾아가 상담받겠다 말씀드리고 그다음 날 점심시간에 40분 간 상담을 받았다. 한 손에 성적표를 들고 기대감을 품은 채 상담을 시작했다. 그리고 상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먼저 진학상담을 받고 난 직후의 내 심경은 그저 막막함 뿐이었다. 국어를 1등급으로 올리거나, 영어를 2등급으로 올려야 했다. 상담 당시 그 정도의 등급을 올리는 건 어려움보다 그냥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왜? 이 상담은 현재 부족한 내 등급만을 고려한 상담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난 받지 못한 높은 등급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어서 그 순간 자연스레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5분쯤 남았을 때 끝난 상담. 반에 돌아가 친구에게 상담내용을 말했다. 그 친구도 그날, 위클래스 선생님께 상담을 받았다. 그 친구 얘기도 들을 겸 말을 꺼냈다. 그 친구는 나보다 더 심하게 등급을 올려야 했다. 평균 1등급 대가 되어야 하는 직업이었기에.
서울 중상위권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선 평균 2등급 초 정도까지는 올려야 했다. 지금은 학생부 교과로 갈 생각이라 국어, 영어가 중요하다. 영어 등급이 4(1학년 1학기 최종 성적)인 걸 생각해볼 때 2로 올리는 건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난 두 번의 시험 동안 공부법을 조금씩 바꿔 가며 했다. 그런데도 결과는 이 모양이니, 막막했다.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니 이 성적을 못 벗어날 것이라 느꼈다.
상담을 받는 중엔 ‘아, 이게 현실인가 보다.’ ‘어렵구나’ ‘홍익대는 말도 안 되네’와 같은 생각을 했다. 경희대 커트라인을 보며 점점 위축됐고, 그렇게 40분이 흘렀다. 부담 때문인지, 걱정되는 바람에 5교시 공부가 잘 안 됐다. 잠은 안 왔지만 집중을 못 했다.
그날 아침에 아프기도 했고 이미 집중도 흐트러진 상태라 야자를 빼고 집에 왔다. 엄마랑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때 엄마의 한 마디가 나에게 활력의 바람으로 불어왔다. “ 그 선생님은 현재 너 등급으로 이 대학을 갈 수 있을지 아닌지 확인해 주신 거네? “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현재 등급으로 대학을 정할 시기가 아니다. 고3도 아니고. 나도 내 성적이 아직 부족하다 생각했으니까 선생님과 상담을 하지 않았어도 등급은 올리려 했다.
상담은 내게 대학교 입학 등급과 현재 내 등급을 비교하며 내 가능성보다 부족한 부분만을 보는 시각을 주었다. 미술 선생님과의 진학상담은 현재 내가 미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이제부터는 어떻게 꾸려나갈지,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절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미활보는 정확히 어떻게 쓰는 건지,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대학에서 가산점을 주는 미술 활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바랐다. 이런 내 기대는 전혀 답을 얻지 못했다. 대신 너는 이 정도로 올려야 해, 가능하겠어?라는, 단답 같은 물음을 받을 뿐이었다.
인생은 절대 내가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게 인생의 재미이자 가혹함이고 이번 진학상담에서 내가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다. 나는 독백으로 끝난 물음을 되돌아봤다.
내가 물은 건 지금 내 성적이 유지될 때 갈 수 있는 대학이 아니었다.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내가 올려야 하는 등급의 수치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간단한 수치는 나도 검색해봤기 때문이다.
내가 물은 건 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더 굳건히 해줄 질문, 미대에서 필요로 하는 조건들이나 팁, 할 수 있을 거라는 북돋음이었다.
그건 내 이상이었다. 현실의 상담은 많이 달랐고 솔직히 선생님 말씀에서 틀린 건 없었다. 정확한 수치이긴 했으니까. 내 성적이 부족한 건 맞았고. 근데 이건 너무 당연한 거다. 내가 부족하다 생각하지 않았으면 애당초 상담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 상담의 순간에 난 내 가능성에 의심만을 품게 되었고 상담이 끝나서도 열심히 성적을 올려야겠단 생각보다 난 못할 거라고, 스스로 한계 짓고 막막한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이게 내가 얻은 상담의 효과였다.
고등학교에 와서 제대로 된 진학 상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경험하고 알게 되었다. 일반적인 진학 상담은 내 현재 성적과 목표 대학 성적의 비교가 주를 이루는구나. 혹시 나만 이런 상담을 받았나 해서 그 친구에게도 물어봤다. 당연하게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친구도 이렇게 비교하는 식의 상담을 받았던 거다. 이 친구는 전에도 담임 선생님께 상담을 받았었는데 그때가 더 별로였다고, 나한텐 절대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받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이 글을 적다 보니 알게 된 점이 하나 더 있다. 나 또한 내가 무엇이 궁금한 지를 정확히 말하지 않은 것이다. “시각디자인과를 비실기로 가고 싶은데 ~~“라고 시작한 내 물음. 내가 더 필요한, 진심으로 더 궁금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질문하지 않았다. 다음에 상담을 받을 땐 정확한 질문을 준비해서 찾아가야겠단 생각을 굳게 다졌다. 그렇다면 나를 위축되게 했던 성적의 비교가 답 일리는 없을 테니까.
내가 해 낼 거란 믿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이 두 가지는 사람을 끝도 없이 성장하게 하는 촉진제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을 더 명확히 하고 꾸준히 하는 건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한다. 마냥 내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만을 보고 있다면 닿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 밖에 안된다.
원하는 대학이 있다. 지금 이 대학을 가기 위해 내가 가장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재미있는 공부법을 만들고 꾸준히 하는 거다. 그 공부법이란 것을 구체화시키는 게 상담보다,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어제 걸어가는 방법을 잃었었고
걸어가는 나만의 방법을 더 굳건히 만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