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 in June' composed by Tan dun
"Music, the greatest good that mortals know and all of heaven we have hear below." (음악은 필멸의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선이며, 땅 위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의 모든 것이다.) — 조셉 에디슨(Joseph Addison)
리움 미술관 멤버십 프로그램으로 음악회에 다녀왔다. 용인 서천에 위치한 삼성인재개발원 공연장까지 꽤 먼 걸음을 했다.
필립 글래스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이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에서부터 헤미(Remi)의 사운드 아트(Sound art)까지, 오늘날의 음악을 현대음악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퍼포먼스라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된다. 순간의 예술이라 하기에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악보가 존재하여 동일한 수행이 가능하니 '사운드 아트'로 명명하는 것이 적절할까.
소위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이 난해한 시작점을 어디서부터 짚어볼까 하다가 현대미술사의 통시성과 연결해 본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은 생 빅투아르 산을 그렸지만, 엄밀히 말해 산 그 자체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원뿔과 같은 기하학적 도형을 밑그림으로 하여 산을 채색한 것이다. 구체성을 벗고 추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시점이다. 현대미술은 구상성이 지워질 것을 예고하며 찰나의 순간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현대음악 역시 "모든 소리가 음악이다(Every sound is music)", 즉 소음(Noise)이나 화음이 아닌 것도 음악의 영역으로 수용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존 케이지 이전, 현대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은 움직임이 있었는데 바로 미래주의 음악이다. 루이지 루솔로는 '소음 예술: 미래주의 선언(The Art of Noises)'이라는 표명을 했다. 사실 미래주의 음악은 미래에 대한 것도 아니었고, 음악이라 부르기에는 미약한 하나의 작은 몸짓에 불과했다. 화가였던 루솔로는 그림에서 음을 느꼈고, 회화로 소음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그는 악기를 만들고 곡도 썼으나,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폐허 속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싹트기 시작했다.
"소음의 예술은 모방의 재생산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소음의 예술은 특별한 음향적 즐거움으로부터 주요 감정적 힘을 뽑아낼 수 있다. 영감을 받은 예술가는 소음을 결합할 것이다."
소음이라는 기호가 사라질 때 비로소 현대음악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화음(Harmony)이 아닌 음악을 감상하기 어려워한다. 낯섦은 거부감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여기서 현대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을 살짝 소개하고 싶다. 판단하려 하지 않고 그저 소리에 자신을 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음악은 녹음된 음원보다는 실황 감상을 추천한다. 종이를 찢는 소리, 조약돌이 부딪치는 소리, 홈이 파인 플라스틱을 나무 도구로 긁는 소리, 그리고 첼로의 선율이 어우러져 놀라운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 탄둔(Tan Dun)이 작곡한 '첼로와 4대의 타악기를 위한 엘레지: 6월의 눈'을 현장에서 감상했다. 조성음악들 사이에 현대음악이 마치 책 속의 책갈피처럼 꽂혀 있었다.
음악은 '음악'이라고 불림으로써 비로소 음악이 된다. 이것이 현대음악의 빛나는 핵심이다. 그리고 이 핵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바로 '동의'다. 존 케이지가 악보를 들고 등장해 피아노 뚜껑을 열고 잠시 앉아 있는다. 사람들은 연주를 기다리며 의자를 끌거나 헛기침을 한다. 그 순간들이 모여 '4분 33초'라는 곡이 된다.
'6월의 눈'은 이러한 현대음악적 동의를 훌륭하게 이끌어낸 수작이다. 6월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제목의 눈은 억울하게 처형된 여인을 기리고, 그 희생을 위로하기 위해 하늘이 흘리는 눈물이다. 그래서일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복잡성과 자연스러움의 조화가 돋보인다. 종이가 찢어지며 나는 소리는 마음을 아리게 한다. 처음에는 첼로가 곡을 이끌지만, 기존에는 악기로 쓰이지 않던 돌과 플라스틱 타악기 역시 첼로와 대등하게 만난다. 화음을 낼 수 있는 악기와 네 가지의 두드림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곡을 변주해 나간다.
(쇤베르크의 무조음악과 에디슨의 녹음 기술 발전으로 인한 변화는 훗날 기술하기로 하고, 우선 아방가르드 음악을 살펴본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연주하지 않음으로써 곡이 탄생했다. 그의 음악은 '현재 순간의 음악'이라 불린다. 우연성, 불확정성, 그리고 예술과 삶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듦으로써 소리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마치 뒤샹이 변기에 사인을 하고 화장실이 아닌 미술관에 두어 작품이라 불러주길 요청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소리의 가능성 실험은 성공을 거둔 듯하다. 그 요청은 음악으로 승인받았다. 케이지의 영향으로 플럭서스(Fluxus) 운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백남준 역시 여러 대의 텔레비전 퍼포먼스를 기획하며 음악, 비디오, 행위예술 및 조각을 하나의 작품으로 융합해 냈다.
음악회의 마지막 곡으로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택시를 기다리며 유튜브에서 '6월의 눈'을 검색해 들어보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느꼈던 "생의 약동"이 사라진 듯한 소리뿐이었다.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연주자와 함께 호흡하며 들었던 그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앞으로 '4분 33초'의 소음을 반복해서 듣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 글래스와 탄둔은 영화음악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중적으로도 호응을 얻는 작곡가들이다.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교차점의 균형을 멋지게 이뤄냈다.
'6월의 눈'은 비극의 노래다. 탄둔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영화 <와호장룡>이 떠올랐다. 두 작품은 닮은 점이 있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것이라 믿으며, 연인을 달래던 청명검을 쥔 소녀는 결국 그와 함께하기를 소망하며 성벽에서 뛰어내린다. 희망은 추락해 버렸다. 헛된 탐욕 속에서 타인의 사랑을 파괴한 소녀는 자신의 사랑 또한 이룰 수 없었다.
삶이란 그렇게, 6월에 눈이 내리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