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회화에는 일관된 정서와 형식적 경향이 흐른다. 차가운 청색 계열의 인체 형상, 기하학적으로 분절된 얼굴, 그리고 무표정하거나 멍한 표정으로 정면 또는 측면을 응시하는 인물들은 전통적인 초상화나 자화상의 관습에서 벗어난다. 이 인물들은 마치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처럼, 특정한 이야기 없이 그저 ‘정물 그 자체’로만 화면 위에 놓여 있다. 감정도 서사도 지워진 채, 인간은 하나의 정적인 오브제로 변형된다.
이러한 회화적 특성은 자화상이라는 장르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읽힌다. 고전의 자화상이 예술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도구였다면, 이 작가의 그림은 해체된 자아의 잔해들을 새로운 질서로 조립하려는 시도다. 얼굴은 단일한 인격의 표상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분할되고 조형적으로 재구성된다.
이 점은 인상주의 시대의 클로드 모네가 그린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과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초상화를 의뢰받은 모네는 정면의 얼굴을 포기하고, 부인의 뒷모습을 풍경화 속 일부처럼 그렸다. 인물은 중심이 아니라 배경 속에 녹아들었고, 표정 대신 부재로 말한다. 인상주의 회화가 감각의 순간성과 인상의 파편들을 포착하려 했던 만큼, 고디베르 부인의 모습은 무의미와 절망이 깃든 풍경 속에 조용히 자리한다.
현대, 작가는 정면을 향해 인물을 배치하면서도, 그 안에 ‘자아’를 온전히 담지 않는다. 오히려 눈은 흐릿하고 감정은 제거되며, 표정은 사물처럼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AI가 많은 기능을 대체하는 비인간적 전환의 시대로 진입했다. 인간은 더 이상 확고한 중심이 아니며,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피사체는 그런 시대 속에서 방향을 잃은 사물이다.
현대는 지향점을 상실한 경험론의 시대다. 모든 것은 ‘걷는 도중의 순간’ 일뿐이며, 목적지는 부재하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 세계에 의미가 없다면 스스로에게 ‘요청‘한다. 해체된 자신을 다시 조립하며, 조립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탐색한다. 이 회화들은 자아가 더 이상 전제되지 않는 세계에서, 다시 자신을 만들어가려는 고요한 시각적 손짓이자 저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