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품으로 보여 줄 뿐.
이번 주에는 유독 잔상이 길게 남는 작가를 한 명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입니다. 사실 저는 작가들의 사회적 활동이나 개인사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예술가가 작품 밖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에는 가급적 고개를 돌리고 싶어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성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거스턴이 후기 작품에서 강한 사회적 성향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제가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의 세계에서 발견한 것은 오로지 '표현의 자유로움'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작가인들 자신의 세계를 마음껏 펼쳐 보이고 싶지 않았겠냐마는, 그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흥미로운 드로잉과 스케치, 그리고 다채로운 작품들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새장' 속에 갇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을 알고 싶어 하지만 결코 완전히 알 수 없고, 반대로 동물은 자신을 알 수 있는 상태에 있어도 굳이 알려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한계를 짚은 것이겠지요.
필립 거스턴은 예술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마도 창작의 순간 그를 스치고 지나간 어떤 강렬한 영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굳이 학문적으로 파헤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화가로서 작품으로 보여주면 그뿐이라 생각했죠. 본질을 분석하는 일은 심리학자나 평론가들의 몫으로 남겨둔 셈입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한 학자가 그에게 수수께끼 같은 언명(statement)들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단지 철학자일 뿐입니다."라고 말이죠.
보통의 예술가들은 구상에서 시작해 점차 형상을 지워나가는 추상의 길을 걷곤 합니다. 물론 예술이 과학은 아니니 정해진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그런데 필립 거스턴은 도리어 추상에서 구상으로 회귀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놀라운 점은 초기의 추상 작업보다 후기의 구상 작품들이 훨씬 더 '추상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는 사실입니다. 구상의 형태를 빌렸을 때 그의 붓질은 더욱 솔직하고 과감해졌습니다.
그의 화폭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한 판의 펜싱 경기가 열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주 섬세한 칼부림, 그리고 칼날이 부딪칠 때마다 번쩍이며 튀어 오르는 불꽃같은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현대 예술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발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예술을 충분히 만끽하고 계신 겁니다. 복잡한 해석의 틀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몸과 마음을 실은 채 작품의 부분과 전체,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활짝 웃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