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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새롬 Nov 13. 2017

#94.하루가 일 년 같은 이스탄불 여행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터키 #이스탄불 #톱카프궁전

#돌마바흐체궁전 #오리엔탈특급열차

#미마르시난 #고등어케밥 #야경

#나자르투어 #2017년8월24일~25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터키 이스탄불>

 연애 때 남편과 함께 대학로에 간 적이 있다. 길을 가다 마주친 아이스크림 수레의 터키 아재가 실없이 날 보고 웃었다. 그리고는 농염한 말투로 '터키 아이스크림 쫀득쫀득. 맛이 기뛍차요.'라고 말했다. 저런 말은 어디에서 배웠을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침 덥기도 하고 해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농락 타임.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통 속 아이스크림을 콘에 몽땅 얹으려는 시늉부터 콘 밑장 빼기와 떨어트리는 척까지 다채로운 밀당이 이어졌다. 이들의 재간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직접 당하니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당하고 싶다는 묘한 스릴도 느껴졌다.

<출처: Comedy TV 맛있는 녀석들. 행복한 김민경씨. >

 얼마 전 곧 터키에 가게 될 테니 인사말이나 알아 두자는 심산으로 인터넷을 뒤지다가 '살면서 알아두면 좋은 터키어'라는 제목의 글을 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 메르하바

감사합니다 = 싸올

내 아이스크림 가지고 장난치지 마 = 베님 돈두라마 일레 오리나마읜


 마지막 문장을 보자마자 현웃이 터졌다. 한국에 있는 터키 아재들의 손놀림도 만만치 않았는데 오리지널 농락 스케일은 안 봐도 비디오다. 외워가면 정말 쓸모 있겠다 싶었으나 그 '외우기'가 많이 힘들 것 같아 마음속에만 넣어두기로 한다.

<10m마다 한 번씩 나오는 국기를 통해 터키의 국뽕력을 가능해본다.>

 마음의 준비만 단단히 마치고 네세바르에서 버스로 7시간 정도 걸려 도착하게 된 터키의 첫 번째 도시는 스펙터클한 역사를 지닌 '이스탄불'이었다. 그동안 이곳을 얼마나 궁금해하고 오매불망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그 '역사' 때문이다. 터키와 이스탄불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열흘 밤을 새도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 로마가 세상을 쥐락펴락 하며 제국을 형성하던 기원전 상황부터 간략하게 짚어 보기로 한다. 

<출처: EBS 다큐10.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집권 당시 비잔틴 제국 영토.>

 기원전 7세기부터 태동이 시작된 로마는 빠르게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 그리고 지중해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및 이집트까지 정복하며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한 명의 왕이 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 다스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 속에 여러 세력 다툼이 생겨난다. 결국 이 다툼의 승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는 황제가 되어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 Byzantium(현재 이스탄불)'으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이라고 명명한다. 이때부터 서로마는 쇠락의 길을 걷고 동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은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을 다시 재건하려는 듯 엄청난 속도로 영토를 넓혀간다. 그래서 만들어진 제국이 바로 '비잔틴 제국 Byzantium Empire'이며 이들의 찬란한 역사는 무려 천년이나 지속된다. 비록 마지막에는 그 넓은 영토 다 잃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하나만 남긴 했지만 말이다.

<출처: 구글이미지. 종교의 자유가 시작 된 밀라노 칙령.>

 여하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엄청난 업적은 수도 천도 말고도 또 있다. 밀라노 칙령.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들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유럽 사회에 슬슬 퍼지려 할 때 로마는 그들을 엄청나게 박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에 올라 밀라노 칙령을 공표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자 핍박받던 기독교가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기반을 넓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장려했고 그때부터 유럽 곳곳에 아름다운 성당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출처: 인물세계사. 천년 장벽을 뚫은 정복자 메메드2세.>

 지리적으로 무역에 굉장히 유리했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은 항상 부귀영화의 중심지였다. 그들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두께의 성벽으로 도시를 감쌌는데 그 성벽은 무려 천년 간 무너지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을 완벽하게 지켜낸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결국 13세기 말 성벽을 뚫겠다고 칠전팔기로 도전 해오던 투르크족의 메메드 2세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내어주고 만다. 그 이후로 지금의 터키 공화국이 세워진 1922년까지 대략 600년의 시간 동안은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투르크족이 이 땅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들도 엄청난 부귀영화를 기반으로 광대한 '오스만 제국 Osman Empire'을 세우기에 이른다.

<지어진지 1400년이 넘은 아야 소피아 성당.>

 이 어마어마한 역사가 숨겨진 나라에 오기 전 다른 건 몰라도 역사 공부는 조금 해야 할 것 같아서 시간 나는 대로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챙겨 봐 두었던 것이 이제야 빛을 발한다. 사실 공부용으로 봤다기 보다는 킬링 타임용으로 보기 시작한 것인데 워낙 쉽고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니 끊지를 못했던 것 뿐이다. 게다가 역사에는 원래 사연도 많고 사건도 많은데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작은 도시에 내노라하는 제국의 수도들이 세워졌다 사라지기를 반복 했으니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오죽 많겠는가. 그렇게 허파에 기대가 가득 찬 상태에서 이스탄불에 발을 딛자마자 무려 1400년동안 단 한차례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아야소피아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냥 숙소 찾아 가던 길에서 말이다. 후. 이렇게 만나자마자 역사로 어퍼컷 날리기 있기 없기.

<만족도 오만퍼센트인 나자르 투어. 두번 아니 세번 강추함.>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 이럴 시간이 없어!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미리 신청해둔 나자르 투어의 한국어 가이드 투어를 시작했다. 멤버는 미모의 가이드님을 포함하여 모두 7명. 다 같이 첫 번째 코스인 '톱카프 궁전 Topkapi Palace'으로 이동하는데 수신기를 통해 멋진 음악이 들려왔다. 투어에 몰입할 수 있도록 가이드님 준비해온 필살기였다. 가이드님 센스 칭찬해. 두 번 칭찬해. 그렇게 나는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에 흠뻑 취한 채 궁전에 도착했다. 담장 밖에는 과거에 사용했던 관, 욕조, 기둥 등 다양한 유물들이 놓여있었다. 얼핏 보면 그냥 돌덩이 같은데 연세들이 기본 천년 이상이다. 그 앞에서 서른한 살의 나는 그저 우주의 점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궁전보다는 요새 같은 느낌이 많이 나는 톱카프.>

 성 안뜰로 들어서자 위풍당당한 톱카프 궁전이 눈에 들어왔다. 이 궁전은 1453년 오스만 제국 당시 건설된 것으로 군사적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름답고 화려한 궁전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름도 '톱카프 = 대포 문'이라는 뜻이라고. 본인들도 처음 이곳을 점령할 때 천년 동안 굳건했던 성벽을 대승도 아니고 진짜 겨우겨우 x100 뚫고 들어왔으니 어떻게 해서든 오래도록 지켜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이스탄불이 국제 사회에서 얼마나 노른자 땅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과도 같다.

<계속 보면 매직아이 같은 아라베스크 문양.>

 내부의 여러 공간들은 아랍 특유의 양식인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 옛날 화가나 전문가들이 직접 붓을 들고 올라가 한 땀 한 땀 그려 넣은 것일 텐데 어떻게 모양이 저렇게 한결같은지 놀라웠다. 당신들이 진짜 복붙 마스터들입니다.

<남자들과 철저하게 분리된 삶을 살았던 여자들의 공간>

 궁전 안에는 '하렘 Harem'이라는 공간도 있었는데, 이곳은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여자들만의 공간이었다. 단, 왕인 술탄과 일부 거세한 환관들은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도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은 아니었고 철저히 분리된 공간에서 여자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조달해주는 역할만을 했던 것 같다. 이곳에서 지내는 여자들은 왕의 어머니와 왕비, 궁녀들과 노예들이었는데 철저한 종교적 이념 아래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 말은 즉슨 일부 유럽의 화가들이 여성들만 지내는 밀폐된 곳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갖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야하게 그려놓은 그림들 모두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왼쪽 사진이 환관들의 숙소이고 오른쪽 사진이 물건을 놓아 두는 방이다.>

 하렘에 들어서면 거세한 환관들이 살며 여성들의 안위를 지키던 숙소가 나온다. 그들은 보통 백인 또는 흑인 노예들이었는데 보안 외에도 여성들에게 왕이 하사한 음식이나 돈 등을 운반해주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직접 줄 수는 없기 때문에 따로 마련된 방 테이블에 물건을 올려두고 신호를 주면 잠시 뒤 여자들이 조심스럽게 나와 그것들을 가져가는 식이었다.

<소박해보이지만 이곳에 쓰인 소재 하나하나가 초고가임.>

 이곳은 하렘의 공간 중 가장 넓고 화려한 장식들이 더해진 곳인데, 이곳을 쓰던 사람은 바로 왕의 어머니였다. 그녀들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는 당시 술탄들의 즉위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왕가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들은 자라면서 술탄이 되기 위해 다른 형제들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으며, 그 경쟁의 끝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었다. 그래야 권력 다툼이나 적통에 대한 쓸데없는 뒷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왕이 된 자의 어머니이니 그 힘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이 뜰을 거닐던 여자들의 삶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왕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살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딱 맞는 신붓감을 골랐다. 그리고 그렇게 선발된 여자들은 왕과 동침한 뒤 임신 결과가 나오기까지 안뜰이 있는 좋은 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일정 기간 이후 임신이 아니라는 진단이 나오면 보통 생활공간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에 마음 한편이 쓸쓸해졌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게 나을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왕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 자식이 다른 자식들을 몽땅 죽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지만 눈앞에서 자식들끼리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안뜰 없고 시설 조금 안 좋은 보통 방에 살면서 교육받을 것 다 받고 평범하게 잘 지내는 것이 더 속 편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하렘이 폐지된 이후 가장 큰 수혜자들은 그렇게 궁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여자들이었다. 하렘을 나와 고향으로 돌아간 그녀들은 궁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조신한 여자'라는 타이틀을 이용해 대부호나 막강한 집안들에 시집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뜰 없는 곳에서 지낸 설움을 한방에 위로받는 기분이었을 것 같다.

<밥 먹으면서 보는 풍경이 대략 이정도.>

 톱카프 궁전에서의 핵심은 사실 보석방에 있는데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지는 못했다. 대신에 진귀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는 곳에 잠시 들렀는데, 그곳에 성경 속 모세의 지팡이나 다윗왕의 검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게 진짜라고는 하는데 진짜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모세와 함께 갖은 고생을 다 겪은 지팡이가 그렇게 깔끔하고 깨끗할리가 없다.

<로코코와 바로크의 완벽 조화로 탄생한 궁전 정문.>

 식사 후 트램을 타고 찾아간 두 번째 코스는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이었다. 건축 시기는 19세기 중엽으로 오스만 제국이 한참 쇠락의 길을 내달리고 있을 때였다. 보면 딱 알겠지만 이 궁전은 톱카프와는 완전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톱카프가 군사적으로 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게끔 만들어졌다면 돌마바흐체는 높은 담장 하나 없이 탁 트인 바닷가에 대놓고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지은 건축가가 호와와 사치의 아이콘인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그것을 능가하는 궁을 만들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제작한 것이라 하니 알만하다.

<베르사유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 돌마바흐체.>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고 나온 것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을 정도로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 궁을 짓는 데 사용된 금은 14톤이나 되며 은도 40톤이나 들었다고 한다. 거기에 반짝반짝 빛이 나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무려 서른여섯 개나 있었다. 그 크기도 제각각인데 보통 하나의 샹들리에 무게가 1톤~2톤 정도 된다고 하니 그 화려함은 상상에 맡기겠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영화 타이타닉에서 많이 본듯한 모습이었는데 알고보니 진짜로 영화 관계자가 이 계단을 본따 영화 속 장소를 만들었던 것이라고. 무엇보다 이 시점에서 완벽하게도 타이타닉 OST를 틀어주시는 가이드님의 센스 소름. 그녀의 준비성에 박수를 보낸다. 진짜 몰입도 최고.

<배에서 내려 궁으로 들어오는 화려한 문>

 하지만 이 모든 화려함은 중앙 무도회장을 받쳐주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


 과거로 돌아가 상상을 해보자. 19세기 날씨 좋은 어느 날, 외교사절단을 태운 배가 '보스포루스 해협 Boseuporuseu Channel'을 가로질러 돌마바흐체 궁 바로 옆에 위치한 로코코 양식의 하얀 대리석 문 앞에 멈춰 선다. 배에서 내린 손님들은 근위대와 외교관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잘 가꿔진 정원을 지나 궁의 연회장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을 따라 들어선 연회장 중앙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4.5톤짜리 샹들리에가 그들을 맞이한다. 존재만으로도 반짝임이 눈부신 750개의 크리스털 전구에 모처럼 불까지 들어와 있다. 영롱한 불빛은 '돌마바흐체=가득 찬 궁전'이라는 뜻처럼 거대한 연회장을 가득 메운다.


 가이드님이 틀어주신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상상을 하니 정말 당시의 화려함이 눈 앞에 펼쳐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현실의 샹들리에는 전기세가 너무 많이 나와 국빈이 방문할 때만 켜기 때문에 어두웠지만 그대로도 참 아름다웠다.

<수상버스 타고 유럽에서 아시아로 순간이동잼.>

 화려함에 압도되었던 시간을 지나 수상 버스를 타고 아시아 대륙으로 출발.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단 15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도시는 전 세계를 통틀어 이스탄불 단 한 곳뿐이다. 역시 이곳에도 붉은 터키 국기가 매달려 있다. 이곳 국민들은 국기 사랑이 남다르다. 거리를 걷다 보면 집집마다 국기가 안 걸린 집이 없을 정도다. 만약 누군가가 국기를 발로 밟거나 태우는 행위를 하면 아마도 길에서 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미마르 시난의 로맨스가 얽힌 미흐리마 술탄 자미.>

 수상 버스를 타고 건너온 아시아 대륙에서는 세기의 로맨티스트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이름은 '미마르 시난 Mimar Sinan'. 그는 오스만 제국의 아주 유능한 건축가였는데 그가 평생을 바쳐 건축한 건물의 수가 대략 293개나 된다고 한다. 정말 밥 먹고 건물만 지었나 보다. 아무튼 그가 건축 못지않게 열정을 받친 존재가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공주였다. 공주의 정략결혼으로 인해 둘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미마르 시난의 사랑에는 끝이 없었던 것 같다. 평생 혼자 살며 일에만 매진하던 그는 어느 날 공주에게 쌍둥이처럼 꼭 닮은 두 개의 모스크를 서로 바라보고 있는 언덕 위에 각각 하나씩 지어 선물하게 된다. 놀라운 점은 매년 공주의 생일인 3월 21일 일몰 시간이 되면 하나의 모스크 첨탑 끝에는 지는 해가 걸리고 또 다른 모스크 첨탑 끝에는 떠오르는 달이 걸리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이런 건축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공주의 이름이 '미흐리마 Mihrimah' 즉 '해와 달'이었기 때문. 평생 수많은 건물을 지었지만 정작 그의 마음속 방은 단 하나뿐이었던 미마르 시난. 오랜 시간 변치 않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로 인해 이 도시가 더 좋아진다.

<역 앞에 장식 되어 있던 클래식한 기차.>

 긴긴 하루의 마지막 코스는 시르케지 역이다. 이곳은 과거 유럽 대륙을 횡단해 이스탄불까지 오갔던 호화 열차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역으로 유명한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도 등장하는 곳이었다. 이 열차는 1883년 운행을 시작해 1977년까지 대략 94년 동안 동양으로의 럭셔리 여행을 꿈꿨던 유럽 부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당시 기차의 내부는 아주 화려했으며 최고급 요리들이 서빙되었고 매일 밤 파티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특급열차 다니던 시절부터 쭉 장사중인 레스토랑.>

 지금도 유럽 일부 구간에서 과거의 화려함을 재연한 오리엔트 특급열차들이 운영되고 있는데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그래도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듯한 비주얼의 럭셔리 열차에 나도 꼭 한번 올라보고 싶다. 코끼리 오천 마리 그려진 펄렁 바지 입고 다니는 전투형 여행 말고 멋진 이브닝드레스를 빼입고 와인을 마시는 럭셔리 여행도 언젠가는 꼭 해봐야지!

<터키 냥이에게 선택 받았다.>

 알차고 감동적이었던 투어는 기차역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우리는 근처 KFC에서 치킨을 먹고 좌 아야소피아 우 블루모스크가 자리 잡은 '술탄아흐멧 광장 Siltanahmet Square'까지 걸어가 벤치에 앉았다. 좌우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구경하며 여유를 즐기는데 어느새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발 언저리에 와 어슬렁거린다. 그러더니 원래 제자리인 양 내 무릎 위로 펄쩍 뛰어올라 자리를 잡고 잠을 잔다. 그래서 나도 꼼짝없이 한 시간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얀 모스크에 주황빛 조명이 더해지면 예쁨 그자체.>

 때아닌 고양이 집사 노릇을 마치고 해가 질 무렵 나자르 투어의 공짜 야경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미팅 장소로 나갔다. 야경투어의 멤버는 가이드님, 한국에서 스쿠버 다이빙 강사 부부, 학회 땡땡이치고 여행 중인 의사 청년 한 명 그리고 우리까지 총 6명이었다.

<야경 좋고, 커피 좋고, 수다 좋고.>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며 시작된 야경 투어는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인 '술레이마니에 모스크'를 들른 뒤 세기의 로맨티스트 미마르 시난의 묘를 지나 야경이 잘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 카페로 이어졌다. 역시 야경 포인트로 유명한 곳답게 사람이 미어터진다. 우리는 겨우 테이블 하나를 잡아 가이드님 그리고 의사 청년과 합석을 하기로 했다. 저녁이 되면 약간 쌀쌀해지는 터키의 8월은 탕약처럼 뭉근하게 끓여 나오는 것이 특징인 터키쉬 커피와 향이 좋은 차이를 마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끝내주는 야경에 맛있는 차 한잔 그리고 방금 만났지만 이상하게 말이 잘 통하는 2인의 합석 멤버와 함께하니 웃음과 수다가 끊기질 않았다.

<터키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차이와 터키쉬 커피.>

 사실 이 웃음의 핵심은 의사 청년이 터키에 오자마자 겪은 '술 사기 썰'이었다. 보통 수법은 이렇다. 혼자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행자에게 사기꾼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자연스레 접근한 뒤 본인도 혼자 여행을 왔다고 같이 놀자고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와의 우정. 캬~ 여행의 로맨스를 꿈꾸던 혼여족들은 이 달콤한 술수에 넘어가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으며 놀기 시작한다. 이놈들이 치밀한 것은 처음에 밥과 술을 사주고 택시비도 본인이 척척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늦어지면 자기가 아는 좋은 펍에 가서 술 한잔 더하자고 한 뒤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술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미 신뢰를 겹겹이 쌓았기 때문에 불쌍한 여행자들은 그들을 따라 외딴 술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잔 마신 술 값으로 대략 300만 원 정도를 요구하는 깍두기 아저씨들에게 둘러 쌓이게 되는 것이다. 의사 청년도 지인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 이후 터혐(?)에 걸려 여행 내내 특정 활동이 끝나면 호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당사자가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해줘서 빵빵 터졌지만,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기도 했다. 진짜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강태공들의 밤은 낮보다 뜨겁다. 핫핫.>

 카페에서의 수다로 한층 가까워진 야경 투어 멤버들과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고등어 케밥집. 가는 길에 이스탄불의 명물인 갈라타 다리를 지나게 되었는데 늦은 시간까지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아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잡은 고기를 즉석으로 팔기도 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어시장인 셈이다. 신기하다.

<마성의 고등어 케밥. 정말 장인의 손길이 느껴짐.>

 이스탄불에서 유명한 고등어 케밥집은 배 위에서 파는 곳과 배가 엄청 나온 에민이라는 이름의 아저씨네 집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둘과 전혀 상관없는 빨간 셔츠 콧수염 아저씨네로 왔다. 배 위에서 파는 곳은 맛이 없고 에민 아저씨네는 줄을 많이 서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이드님이 빨간 셔츠 콧수염 아저씨의 고등어 케밥도 엄청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라고 하셨기에 믿고 주문을 넣었다. 주문이 들어가자 아저씨는 아주 아주 정성껏 고등어를 굽기 시작하셨다. 나는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내는 장인 정신에 가까운 아저씨의 손놀림에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탄생한 명품 고등어 케밥은 비린내 하나 없이 담백하고 맛있었다. 진심!

<달달 폭발하는 바클라바. 차이랑 완벽 궁합.>

 케밥을 게눈 감추듯 해치우며 마지막으로 찾아온 곳은 또 먹는 곳. 야경 투어 가이드님이 작정하고 사심으로 짠 루트 같다. 근데 그게 또 내 취향이다. 데헷. 이번 먹는 곳은 터키식 디저트인 '바클라바 Baklava'를 파는 가게였는데, 무려 1871년부터 영업을 해온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바클라바 집이라고 한다. 이름은 '카라쾨이 귤류오울루 Karakoy Gulluoglu'. 페스츄리처럼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이 디저트는 달콤한 꿀 그리고 견과류와 함께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냈다. 물론 여기에 터키 차이 한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운 좋은 날만 만날 수 있다는 140년된 바클라바집 사장님과 한방.>

 달달한 것이 들어가니 또다시 수다에 불이 붙는다. 이번에는 한국에서 스쿠버 다이빙 강사를 하고 계시는 부부도 합세하여 더욱 강력한 수다 패밀리가 형성되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닌 덕에 온몸에 피로가 덕지덕지 쌓여가는데도 개미지옥처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수다에 매진했다. 여기서 가장 이상한 포인트는 디저트 가게를 나와 집에 가다 말고 술탄아흐메드 광장에 서서 새벽 3시까지 수다를 떨었다는 점이다. 뭐지 이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꿀 떨어지는 케미는. 다들 어쩜 이리도 입담 좋고 웃긴 것인가. 늦은 밤 아니 이른 새벽, 오들오들 떨면서도 광활한 세상을 비행하는 청소년들처럼 광장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눈 오늘의 기억은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이제 겨우 하루 맛보았을 뿐인데 이놈의 이스탄불은 왜 이렇게 기록할게 많은지 모르겠다. 그래도 무엇 하나 그냥 넘길만한 것이 없어 이곳에 길고 긴 썰을 둘둘 풀어 보았다. 내일은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질까. 하루가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나는 신비의 나라 터키.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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