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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새롬 Nov 22. 2017

#95.이스탄불 과거 여행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터키 #이스탄불 #아야소피아

#블루모스크 #갈라타다리

#갈라타탑 #술탄아흐멧광장

#2017년8월25~26일


<동서양을 잇는 무역의 통로 터키 이스탄불>

 옛날 옛날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아주 부유한 도시가 있었다. 도시는 무역을 하기 위해 찾아온 상인들과 진귀한 물건들로 항상 북적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여가 시간이면 종종 커다란 경기장에 모여 전차 경기를 구경하곤 했다. 전차 경기는 주로 청색당과 녹색당의 대결이었으며 이 두 개의 팀은 일종의 정치적 성향을 띈 정당처럼 변모해 갔다. 보통 청색당은 귀족들의 지지를 녹색당은 상인과 기술자와 같은 중간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각자의 당에 사병을 조직했으며 그 세력은 나날이 커져갔고 그럴수록 두 당의 갈등은 점차 깊어만 갔다.

<출처: 구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모자이크화>

 그러던 중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로 즉위를 하게 되었다. 그는 즉위 당시 청색당을 지지했지만 사병을 거느린 정당들이 자신의 권력에 도전을 하게 될까 봐 두 당 모두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기독교 중심의 정치는 시민들이 기존에 믿던 다신교적 신앙에서 나온 모든 풍습들을 금지시켰고 도시 곳곳에 화려한 건축물들을 짓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기까지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두 개의 당과 시민들은 서로 합심하여 결국 콘스탄티노플의 3분의 1이 잿더미가 될 정도의 큰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니카 폭동'이다.

<출처:구글/황후 테오도라 모자이크화>

 처음 폭동이 일어났을 때 황제는 겁을 먹고 도망가려 했었다. 하지만 대쪽 같은 아내 황후 테오도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비록 그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지금은 도망칠 때가 아니다. 황제라는 사람이 망명자의 몸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나를 황후 폐하라고 부르지 않는 날을 보내기 싫다. 나는 옛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황제의 옷은 최고의 상복이다.'


 단호박 같은 테오도라의 말에 황제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전차 경기장에 모은다. 협상을 제안하겠다는 명목 하에서였다. 하지만 황제는 군사를 동원하여 경기장을 봉쇄하고 그곳에 모인 수만의 시민을 학살한다. 그날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무려 3만이었다.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피가 무릎까지 차올랐다는....

<새로 짓기 전 불타 없어진 과거 아야소피아의 흔적>

 황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불태운 '아야소피아 Ayasofya'를 다시는 불타지 않을 세계 최고의 성당으로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것도 단 6년 안에. 14세기 르네상스 이후에 지어진 성당들도 건축 기간이 보통 100년이 넘는데 황제가 명령을 내렸던 때가 6세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명령이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축가들이 가져온 도면에는 당시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성당 건축 계획이 들어 있었지만 불복종의 끝은 죽음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가 성당 짓기에 매달렸다. 그들은 독한 염료들을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사용해야 했고 신전에서 가져온 거대한 돌기둥들을 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기 위해 일 했지만 결국 죽음뿐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어린 아야소피아의 벽>

 그렇게 많은 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재건된 아야소피아는 왕이 제시한 6년보다 2개월이나 빠른 5년 10개월 만에 완성됐다. 빠르게 지었지만 졸속은 아니었다. 건축이 완료된 536년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지진으로 일부가 훼손된 적은 있어도 무너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성당 내부는 엄청난 양의 황금과 보석으로 호화스럽게 채워졌는데 이곳에 얼마나 보석이 많았으면 전쟁을 치르다가 돈이 모자라면 이곳에서 일부를 떼어다가 사용한 뒤 돈이 생기면 다시 복원하곤 했다고 한다. 여하튼 이러한 비화를 가진 아야소피아는 바티칸의 성 바울 대성당이 건축되기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성당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특징을 둘 다 지닌 오묘한 아야소피아.>

 지금은 내부에 들어가도 그때의 부귀영화는 찾아볼 수 없다.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장악하며 성당이었던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리모델링했기 때문이다. 점령 당시 메메드 2세는 많은 성당들을 파괴했지만 아야 소피아만은 본인의 것이니 손대지 말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래서 외부는 성당임을 보여주는 붉은 벽과 모스크임을 보여주는 회색 지붕이 공존하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주변의 첨탑도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며 생긴 것이다.

<군데 군데 남아 있는 황금 모자이크의 흔적을 통해 과거의 화려함을 상상해본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성당도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 사원으로 리모델링할 때 석회칠을 해서 덮어버린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들을 일부 복원해 그때의 찬란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보면 천장이 다 황금인데 그냥 칠한 것도 아니고 새끼손톱보다 작은 금 조각들로 만든 모자이크다. 저 높은 곳에 저 작은 것들을 일일이 붙였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진짜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이곳이 모두 저런 황금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생각하니 또 입 벌리고 감탄을 하게 된다. 정말 모순의 극치다.

<깨알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 아야소피아 내부>

 무려 1500년 동안 한 자리에 서서 과거의 증인이 되고 있는 성당은 현재 내부 수리가 한창이다. 일부가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이것 또한 역사의 한 장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려져 있어도 신기한 사연이 담긴 포인트들은 충분히 다 볼 수 있다.

<국교가 이슬람으로 변하며 천사의 얼굴이 가려지게 됐다.>

 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자르 투어의 미모의 가이드님과 함께 왔기 때문에 그냥 왔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디테일들까지 모두 짚고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몇몇 복원을 해 두었지만 천정에 그려진 천사들의 얼굴이 이슬람 사원이 되면서 모두 가려졌었다는 것이나, 3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커다란 기둥 옆에 찍힌 미스테리한 손자국에 관한 것, 그리고 기독교 성당으로 지어졌는데 구석진 곳에 포세이돈 관련 조각이 남아있다는 것 등을 말이다.

<누군가의 장난일까 아니면 정말 심오한 의미가 곁들여진 것들일까.>

 오전 대부분의 시간을 아야소피아 구경하는 데 사용하고 남은 시간은 건너편에 위치한 '블루 모스크 Blue Mosque'를 보러 갔다. 이 둘 사이에 평화롭게 펼쳐져 있는 광장이 바로 '술탄아흐멧 광장 Sultanahmet Square'이다. 숙소가 광장 근처라 매일 이곳을 지나다니고 있는데 낮이나 밤이나 정말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걷다가 고개를 들어 한쪽을 바라보면 1500년의 역사가 숨 쉬는 아야소피아가 서있고 반대를 바라보면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블루 모스트가 서있으니 말이다. 며칠이 지나도 도무지 적응이 안될 만큼 설레는 광장이다.

<아야소피아의 명성에 정면으로 도전장 내민 블루모스크.>

 '블루 모스크 Blue Mosque'의 원래 명칭은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Sultanahmet Mosque'이며, 1616년 건축되었다. 건축 당시 술탄(왕)은 건축가에게 하나의 황금 미나렛(탑)을 세우라고 주문을 했는데 번역상의 오류로 여섯 개의 미나렛을 세우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alti(여섯)'과 altin(황금)'이 굉장히 비슷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탄은 잘못 세워진 여섯 개의 탑을 마음에 쏙 들어했고 다행히 건축가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여긴 어떻게 얽힌 이야기들이 하나 같이 다 재미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휴. 만사가 다 재미 투성이네.

<머리를 숙이시오.>

 블루 모스크 문에는 이렇게 쇠사슬이 설치되어 있는데 '알라에게 나올 때는 신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모두 고개를 숙여라'라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블루모스크 내부의 모습>

 사실 이곳이 처음 지어지게 된 계기는 아야소피아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는 천년 전에 지어진 아야소피아를 누를 수 있을만한 건물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그 명성에 도전하기 위해 블루 모스크를 짓게 된 것이다. 그래서 광장에 서서 둘을 번갈아 보면 오묘하게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내 생각에 블루 모스크는 아야 소피아를 이길 수 없었던 것 같다. 겉모습으로는 블루 모스크가 더 정갈하고 아름답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내부를 보면 아야소피아가 훨씬 아름답기 때문이다.

<끔찍한 학살이 자행 되었던 히포드럼 광장>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쟁쟁한 두 건물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니카 폭동의 학살 현장인 '히포드롬 광장 Hippodrome Square'이 나타났다. 날씨는 맑았고 기분도 좋았지만 이곳에 흐르는 역사의 기운에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늘처럼 날이 맑던 어느 날 그들이 이곳에서 맞이 했을 공포는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늘에 앉아 가이드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과거 '폭동'이라 불리는 그 사건이 정말 '폭동'이었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사건의 주역들이 황제를 상대로 승리했다면 역사는 그날을 '혁명'이라고 불렀을까. 그랬다면 이곳 광장에 피가 차오르는 일은 없었을까. 그렇게 무질서한 궁금증들이 이열 종대로 한참 동안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들이 단순한 가정일 뿐이기에  나는 그로부터 어떤 답도 얻어 낼 수 없었다. 그저 눈 앞에 펼쳐진 과거의 흔적들을 통해 이미 결정된 역사의 한 장면을 볼 뿐이었다.

<으스스한데 쓸데 없이 화려한 지하 저수지>

 광장에서의 사색을 마치고 찾아간 곳은 지하 궁전이라 불리고 있는 '예레바탄 사라이 Yerenatan Basilica Cistern'였다. 이름은 궁전이지만 실제 용도는 지하 저수지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도시에 안정적인 수도 공급을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인데 궁전이라 불릴 만큼 내부 인테리어가 정말 예술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지하답게 굉장히 으스스했다. 바닥에는 과거에 저수지로 사용되었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기 위해 물을 채워두었는데 그것 때문에 더 괴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저수지 제일 안쪽에 가면 기둥 아래 거대한 메두사의 머리가 놓여 있다. 그것도 두 개 씩이나. 첫인상이 그다지 부드럽지 않은 그녀들을 왜 저기다가 데려다 놨을까. 혹시 저수지에 독 타는 사람들을 저주하려고 가져다 놓은 것일까. 나는 이런저런 추측과 억측들을 늘어놓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의미 없음'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이유는 메두사의 머리들이 하나는 옆으로 하나는 거꾸로 뒤집어진 채 놓여 있기 때문이란다. 당시 건물의 기둥들은 보통 기독교 공인 이전에 유행하던 다신교의 신전에서 떼어다가 사용하곤 했는데 그때 그냥 기둥 받침대로 쓰기 딱 좋아 보이는 것을 가져온 것뿐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계속 보다 보니 뭔가 고생스러움이 느껴졌다. 안쓰럽; 파이팅하세요. 메두사 자매님들.  

<세계에서 두 번쨰로 오래된 지하철이라고 한다.>

 어두컴컴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을 벗어나 무려 142년이나 된 지하철 '튜넬'을 타고 갈라타 타워를 보러 갔다. 탑이 위치한 갈라타 지역은 개성 있는 상점들이 많아서 볼거리도 풍부했다. 그렇게 여기저기에 시선을 빼앗기며 가파른 골목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드디어 나타나는 '갈라타 타워 Galata Tower'. 1638년 어느 날, 헤자르펜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직접 한 땀 한 땀 만든 날개를 매달고 이곳에서 뛰어내려 날기 실험을 했는데 놀랍게도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대륙의 어떤 언덕 위에 성공적으로 착륙을 했다고 한다. 라이트 형제가 모티브로 삼았던 독일의 릴리엔탈이 사람이 탈 수 있는 행글라이더를 만들었을 때가 1891년이었으니까 그보다도 무려 253년이나 앞선 셈이다. 역시 덕후의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빛이 난다. 어후 존경.

<갈라타 타워 앞 하트 풍선 아저씨.>

 긴긴 하루의 마지막 코스는 이집션 마켓이었는데 구경을 마치고 갈 사람들은 가고 남을 사람들은 남아서 가이드님과 분위기 좋은 카페로 이동했다. 일곱 명 정도가 모여 앉아 수다도 떨고 가이드님이 쏘신 음료도 먹으며 가볍게 2시간 정도 친목을 다졌다. 그 시간 덕분에 친해지게 된 50대 부부 분들이 본인들 드시려고 싸 온 김치가 남는다며 우리에게 나눠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얻게 된 김치 아니 금치는 피자와 케밥에 물려갈 무렵 하나씩 꺼내 알차게 먹었다고 한다.

<인테리어가 아주 파랑파랑한게 취향저격.>

 어제처럼 1년 같은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데 저녁 9시쯤 누군가에게 카톡이 왔다. 가이드님이셨다. 지금 야경투어 끝나고 몇몇 분들과 함께 맥주 한잔하고 있는데 우리도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피곤했기 때문에 살짝 고민했지만 한국인들과 이렇게 수다 떨며 어울리는 것도 얼마만인가 싶어서 부랴부랴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술탄아흐멧 광장 1인자 개님>

 그렇게 잠시만 앉아 있다가 돌아와야지 하고 나선 길은 또다시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연결되었다. 사실 자리에서는 2시쯤 일어났는데 그놈의 술탄아흐멧 광장이 문제였다. 왜 여기만 오면 지나가지를 못하고 서서 수다를 떨게 되는 걸까. 쌀쌀한 새벽녘 추위에 떨면서도 계속 서있게 되는 마법의 광장. 아,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데자뷰인가. 무튼 덩치가 나보다 큰 개들이 영역 다툼을 하느라고 떼를 지어 뛰어다니며 컹컹 짖어 대는 야생의 와중에서도 우리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수다 트랩에 걸린 영혼들은 결국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더는 추위를 견딜 수 없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수다 덫이 설치 된 것으로 추정되는 술탄아흐멧 광장>

 여행을 하면 멋진 순간들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인 것 같다. 초창기 떠돌이 시절에 만났던 인도네시아 오싱 게스트하우스의 '베니'부터 천사 같았던 말레이시아의 '우딘' 그리고 잊을만하면 만나고 또 만나게 되었던 '지현언니&성범오빠'와 이곳 이스탄불 나자르 투어에서 만난 '인연'들까지. 다들 잠시 뿐이었지만 그들은 분명 내 인생에 진한 흔적을 남겼고 우리 여행에 깊은 울림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이 여행의 주인공은 나와 남편을 포함한 '모든 보통의 사람들'이다. 나와 당신이 이미 걸어 본 또는 언젠가 걷게 될 여행길을 '지금 걷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지극히 소소하지만 그 평범함이 가장 큰 무기인 그들과 우리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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