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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새롬 Dec 15. 2017

#97.괴상하고 아름다운 괴레메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터키 #카파도키아 #괴레메 #열기구

#그린투어 #가이드잼 #여행친구

#2017년8월31일~9월2일


<터키 중동부 카파도키아에 위치한 작은 도시 괴뢰메> 

 바람도 비도 없는 어느 맑은 날, 괴레메라는 외계 행성에 다다른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높은 곳에서 이 땅을 내려다 보기로 결정했다. 간밤의 여운이 짙은 새벽 5시, 머리도 감지 않은 채 가진 옷을 모두 껴입은 괴상한 모습으로 게스트하우스 문 앞에 섰다. 잠시 후 엔진 소리가 요란한 낡은 봉고 한대가 멈추더니 우리 둘을 날름 실고 어둠이 내린 행성의 골목길을 내달렸다. 온통 사막 빛의 바위뿐인 황량한 이곳에서 그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듬성듬성 내려앉은 가로등 불빛뿐이었다.

<어둠을 입은 산은 고요하지만 요란스럽게 아름답다.>

 달과 해가 공존하고 낮과 밤이 교차될 때쯤 봉고는 어느 허허벌판 위에 우리를 내려놓고 무심히 떠났다. 가진 옷을 몽땅 입었지만 괴레메의 여름 새벽은 너무나도 추웠다. 대지도 소멸시킬 듯 맹렬하게 타오르던 한낮의 뜨거움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성은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실크 가운이라도 되는 듯 어둠을 온몸에 두른 채 적나라하게 윤곽을 드러낸 바위 산들은 지나치게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붉은 열기가 열기구를 가득 채우던 순간>

 그때였다. 어디선가 몰아친 강렬한 화기가 어둠이 내렸던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우리는 불꽃의 중심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불길은 보란 듯이 제 몸을 불려 나갔다. 그리고 그 결에 죽은 듯 누워있던 거대한 풍선 하나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우리 둘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이 행성을 내려다보기로 했던 결심을 떠올렸다.

<떠오를 준비 끝!>

 풍선이 제 몸을 곧게 세우자 그 아래로 잘 짜인 바구니가 나타났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삼삼 오오 허허벌판으로 모여들었다. 날아오를 채비가 끝나니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바구니에 올랐다. 우리도 바구니 한쪽 모서리에 서서 천천히 행성 꼭대기로의 비행을 시작했다.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 풍선들>

 공중에 올라 주변을 살피니 뜨거운 불꽃을 품은 수많은 풍선들이 앞 다투어 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괴레메의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면 아무래도 가장 높은 곳 만한 게 없을 테니 다들 잠을 포기하고서라도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나는 잠시 마음이 조급해졌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누구보다 먼저 이 행성의 맨 얼굴을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풍선은 쉼 없이 뿜어져 나오는 불꽃을 묵묵히 감싸 안으며 하늘 위로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풍경이 주는 감동은 입을 더디게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태양이 온 세상을 밝히던 순간 나는 비로소 이 기괴한 행성의 민낯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열기구 밑에는 아직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르지 못한 수많은 풍선들과 지금껏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괴한 행성 괴레메가 놓여 있었다. 풀 한 포기 없어도 아름다울 수 있는 이곳. 지구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보물 상자 같은 이 땅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열기구와 괴레메의 완벽한 조화>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차가웠던 공기는 태양의 등장으로 한결 온화해졌고, 온통 어둡던 하늘은 파스텔 빛으로 물들어 갔다. 남편과 나는 아주 천천히 허공을 가로지르며 괴레메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순간의 감동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눈으로 그리고 마주 잡은 손 사이로 서로에게 조금씩 흘러들고 있었다.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열기구를 탔던 그날 이후 우리는 또 한 번 이른 새벽 가진 옷을 모두 껴입고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해가 뜰 동안 마을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 앉아 추위와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 열기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잠시 후 괴레메의 하늘은 온통 알록달록한 풍선들로 가득 찼다. 장난감 같아 보이는 열기구들은 이 괴상한 마을을 순식간에 동화 속의 한 장면으로 데려갔다. 그 바람에 굳어있던 동심이 스르르 녹아 머리와 마음에 달콤하게 번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풍선들 사이로 날아 가는 서른 넷의 어른이.>

 열기구 구경이 끝나면 조식을 먹고 게스트하우스 동굴 방에 들어가 늘어지게 낮잠을 청했다. 그리고 낮이 되면 괴레메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투어에 참가했다. 괴레메는 주요 장소들 간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투어를 신청해서 다니는 편이 났다. 대표적으로 그린 투어와 레드 투어가 있으며 인터넷 한인 여행사에서 신청하는 것보다 마을에 있는 현지 여행사에서 신청하는 것이 더욱 저렴하다. 하지만 한인 여행사에 신청하면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터키인 공인 가이드를 통해 이곳의 역사를 세밀하게 전해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하게 한인 여행사를 통해 예약을 했다.

<한국어 초능력자 가이드 잼과 함께 하는 데린쿠유 구경.>

 첫 번째 그린 투어는 '데린쿠유 Derinkuyu'와 '셀레메 수도원 Selime Monastery' 그리고 '으흘랄라 계곡 Ihlara Valley'과 '비둘기 계곡 Pigeon Valley'을 돌아보는 코스로 진행되었다. 안내를 맡아준 가이드의 이름이 '잼'이었는데, 그는 '핵잼' '꿀잼' 등의 고급 어휘까지 사용할 줄 알았다. 어디에서 배웠냐고 물으니 엄마 아빠와 여행 온 '초딩'들이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잼은 정말 한국사람처럼 한국어를 구사했다. 나중에 투어 멤버들이 성이 김씨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말이다.

<한땀 한땀 정성껏 지어 놓은 셀레메 수도원.>

 한국어 초능력자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지하 동굴 교회인 '데린쿠유 Derinkuyu'였다. 깊은 우물이란 뜻의 데린쿠유는 지하 8층까지 내려갈 수 있으며, 그보다 더 깊은 층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 이 지하도시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오기 훨씬 전인 기원전 2천 년 경이다. 척박한 환경과 추운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지하 도시를 건설했던 괴레메 사람들은 이곳뿐 아니라 높이 솟은 바위에도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겨난 공간들이 로마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기독교인들의 교회와 학교와 쉼터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데린쿠유 다음으로 방문한 '셀레메 수도원 Selime Monastery'이 바로 그런 바위 속 마을 중 하나였다.

<바위에 난 구멍 하나하나가 모두 목적을 가진 공간이라는 사실.>
<심지어 교회는 2층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여러 개의 아치형 문들로 이루어진 2층 구조의 교회 곳곳에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성화들이 남아 있었다. 이외에도 바위 속에는 생활이나 교육 등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다양한 공간들이 미로처럼 가득했다. 우리는 안내된 길을 따라 하나씩 시간을 들여 수천 년 전 사람들이 손수 지은 집들을 구경했다. 제대로 된 기계 하나 없던 그때 그들은 어떻게 이런 공간들을 만들어 냈을까. 보면 볼수록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기는 진짜 빼박 외계 행성이다.>

 바위 속 수도원뿐 아니라 그곳에서 내려다본 경치 또한 신기하긴 매한가지였다. 오죽했으면 스타워즈 촬영팀도 이곳이 상상 속 외계 행성을 표현하기 딱 알맞은 배경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아쉽게도 실제 촬영 장소는 이곳을 본떠 만든 세트장이었지만 말이다.

<황량한 괴레메의 풍경과는 사뭇다른 으흘라라 계곡의 모습>

 점심 이후의 일정은 협곡을 따라 역시나 수많은 동굴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의 은신처들이 들어서 있는 '으흘라라 계곡 Ihlara Valley'이었다. 식수를 구하기 쉽고 계곡 안쪽 바위에 집을 지으면 겉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장점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감시와 핍박이 조금 잠잠해지면 동굴을 나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이모, 여기 백숙 두 마리요.>

 16km 정도 되는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낯익은 장면들이 나타났다. 물가에 설치된 그늘이 있는 평상, 그 위에 삼삼 오오 모여 앉은 가족들. 왠지 '이모 여기 백숙 두 마리요'라고 주문을 넣어야만 할 것 같은 이 분위기는 뭘까. 우리네 휴가철 풍경이 떠오르는 이곳에서 시원한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지나가는 오리들도 구경하다가 다시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가이드 잼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보다 무려 두 살이나 어렸다. 잼은 마치 한국사람인 양 나이를 트자마자 서열정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에게 깍듯이 누나라고 불렀다. 결혼해서 예쁜 아내와 딸도 있는 데다 수염도 오빠 같으신 분께서 나를 이리도 높여 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비둘기 계곡에는 비둘기가 진짜 허벌라게 많다.>

 그린투어의 마지막은 '비둘기 계곡 Pigeon Valley'이었는데, 과거 이곳에 살던 수도사들이 소식 전달용으로 비둘기를 길렀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지금도 여전히 엄청난 수의 비둘기가 살고 있으며 역시나 카파도키아의 풍경을 내려다보기 좋은 곳이었다.

<여행자들의 만찬. 이것저것 시켜서 나눠 먹기 권법.>

 투어로 꽉 찬 하루의 끝은 역시나 숙소에서의 뒹굴거림. 그렇게 휴식 시간을 즐기다 보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동굴 방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까무잡잡한 한국인 친구들이 고개를 내밀고는 밥 먹으러 가자고 기분 좋은 제안을 한다. 이 게스트하우스에 유독 한국인들이 많이 묵는 것인지 아니면 엄청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린 벌써 세 명의 재미있는 여행자들을 만났다.

<괴레메 최애 피데 가게. 무려 6번이나 갔다.>

 민섭 씨는 6개월 여행을 목표로 한국을 떠나왔는데 이집트의 다합이라는 곳이 너무 좋아서 무려 4개월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 덕에 남은 국가들을 돌아볼 시간이 2개월밖에 남지 않아 한 도시를 하루씩 찍고 지나가는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 괴레메에서는 세밤이나 자는 여유를 부렸다.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준호 씨는 우리처럼 하던 일 내려놓고 1년간의 여행에 도전하는 중이었는데 시작한 지 대략 3개월 정도 밖에 안됐다는 점이 굉장히 부러웠다. 터키를 떠나면 아프리카로 갈 예정인데 그 이후 일정이 맞으면 함께 아이슬란드에 갈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용주 씨는 여행을 다니며 엄청나게 많은 사건사고를 겪어서 불행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에 기죽지 않고 꾸준히 목표한 바를 실행 중인 당찬 청년이었다.

<새로운 곳으로 먼길 떠나는 청년들이여, 안녕!>

 준호 씨가 터키 남부 도시인 안탈리아로 떠나던 날, 여느 때처럼 다 같이 숙소 근처에 위치한 피데 집에 갔다. 피데는 터키식 피자를 일컫는 말인데 모양이 길쭉한 타원형이어서 다 구워지면 뚝뚝 잘라 접시에 담아 준다. 식탁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여행자들은 맛있게 구워진 피데를 먹으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고 또 웃었다. 나는 오랜만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만나 실컷 떠드는 것 자체가 그냥 좋았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어딜 가나 이방인인 삶을 살다 보니 언어가 주는 위안이 참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상대가 하는 모든 말들이 머리와 마음에 술술 와 닿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준호 씨가 떠난 다음 날 저녁 민섭 씨와 용주 씨도 배낭을 메고 조지아로 떠났다. 며칠간의 짧은 만남 속 우리 모두는 여행이라는 하나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괴상한 모습의 괴레메와 너무나도 잘 어울릴 만큼 변화무쌍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스스로 선택한 삶이 어떤 결과를 보여 준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용기를 가졌다. 그러므로 모두, 아름다웠다. 시간이 만들어 낸 이 멋진 행성 괴레메처럼 우리의 인생도 점차 멋진 흔적을 지닌 역사가 될 것이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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