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호주 #시드니 #멜버른 #기차
#백야축제 #WhiteNightFestival
#2017년2월17일~18일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여러 걱정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저녁 8시 23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11시간을 달려 멜버른으로 가야 했고, 14달러씩 2장이 남은 파~국의 교통카드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난감했고, 나름 거대한 짐을 지고 기차를 타는 밤까지 어떻게 버티느냐도 관건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주인장이 우리 사정을 듣고 체크아웃 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루어 주었기 때문에 2시쯤 시티로 나가 6시간 정도만 버티면 된다는 것. 짐을 이고 지고 어딘가를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은 처음이기 때문에 살짝 긴장이 됐다. 하지만 늘 그렇듯 걱정은 지구 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행위라는 것을 인지하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여행자의 초심을 챙겨 들었다.
숙소를 나서기 전 오늘은 아점으로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다 생존을 위한 특별한 음식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양파와 파 그리고 홍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한국에서 공수해온 스프를 입맛에 맞게 풀어 준 뒤 어제 먹다 남은 스파게티면을 삶아 함께 보글보글 끓여 만드는 일명 '스파게티 라면'. 일단 마법의 스프가 들어갔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고, 얼큰함이 있으니 더더욱이나 실패할 수 없는 메뉴였다. 면이 두꺼워서 약간 낯설었지만 시드니 도착 이후 가장 맛있는 식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떠나야 할 시간이 되어 풀어헤쳤던 짐을 착실히 다시 챙겨 넣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양이 프랭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긴 뒤 집을 나섰다. 사진상으로 짐 크기가 작아 보이는 것이 함정이지만 남편은 18kg 정도 나는 15kg 정도를 감당하고 있다. 조금 웃긴 것은 저 가방을 내려놓으려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짐 무게에 딸려 뒤로 털썩 눕게 된다는 사실. 그래서 최대한 '나는 지금 가방에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니라 가방과 놀러 가고 있는 중이야'라는 의미의 표정과 제스처 등을 의식하며 연습 중이다. 이러다 연기 대상 받을지도 모른다.
열차 출발 6시간 전. 네이버 검색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짐은 기차에 가지고 탈 수도 있고, 역 내에 있는 짐 센터에서 일정 절차를 걸쳐 미리 수화물로 부칠 수 있다는 것이다. 쾌재를 부르며 어디에 가면 그 속 시원한 짓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기 위해 안내원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뭐 좀 물어봐도 되겠냐고 정중히 이야기했더니 이 할아버지 대뜸 No라고 대답한다. 한국에서 유행 중인 아재식 농담이 여기에서도 성행 중이었다. 나는 그의 농에 맞추어 인심 좋은 손녀의 얼굴로 '저스트 원'이라고 대답했다. 자칫 안무도 같이 나갈 뻔했다ㅋㅋ
짐을 부치고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대합실에 있는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중년 부부가 우리 옆자리에 와 앉았다. 순간 우리는 각 14달러나 남아 있는 두장의 교통카드를 저분들께 드리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말을 걸었다. 학회에 참석차 오셨다가 남은 시간 동안 여행하고 계신 거라 현금이 하나도 없어 택시만 타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래서 교통카드로 페리를 타고 즐기는 야경이 얼마나 멋진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카드를 건넸다. 그분들은 너무 고마워하시며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셨다. 보니 광주 과학 기술원에 연구원으로 계신 분이었다. 이런 인연을 또 어디서 만나겠는가.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인 것 같다.
여차 저차 해서 오른 밤기차. 그곳은 조용했고, 11시간을 달려야 했고, 매우 불편했지만 저렴했다. 우리는 늘 그렇듯 불편하고 저렴한 방법을 선택했다. 덜컹이는 기차에서 20년은 더 된 미드 프렌즈를 보며 킥킥대다가 비싼 물을 아껴 마시며 서로의 머리에 기대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자 기온은 더욱 내려갔고, 따로 가져온 얇은 침낭을 꺼내 덮었다. 그 순간 왜인지 모르게 서로가 있어 참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행군을 같이하는 전우애랄까. 뭐 그런 비슷한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멜버른에는 막내 삼촌이 살고 계신다. 약 20년 전 어떤 도움도 없이 이 곳에 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멋진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계신다. 삼촌을 만나기로 한 2시 전까지 우리는 시티 곳곳을 누빌 수 있는 공짜 트램을 탔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우린 복스힐Boxhill 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멜버른 전용 교통카드를 구매해야 했다. 두근두근. 두 번 다신 같은 실수 하지 않으리. 지난번 실수의 아픔을 딛고 이번에는 딱 10달러씩만 정확히 충전에 성공했다. 다만 카드값을 따로 6달러 받는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사건들을 단박에 정리해 주는 것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약속의 장소 복스힐역, 그곳에서 우린 뜻밖의 무언가를 만나게 되었다.
네네 치킨ㅋㅋㅋㅋ 내 사랑 나의 사랑 치킨. 그것도 오리지널 한국인 감성이 물씬 배어있는 무려 '네네 치킨'을 멜버른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오래전 헤어진 이복동생 같은 건 물론 나에게 없지만 만약 있다면 지금 그 아이를 만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 반갑. 거기다 삼촌은 우리를 만나자마자 수많은 아시안 식당을 제쳐두고 네네치킨에 데려갔다. 역시 가족은 하나다.
삼촌은 오랜만에 만난 우리를 위해 특별한 음식들을 준비해 주셨다. 아닌가. 그냥 이렇게 매일 먹는데 우리가 온건가 싶기도 하다ㅋ 무튼 맛있는 음식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오랜만에 매우 이로운 식사를 하고, 우린 서둘러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1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집에서 쉬고 싶었지만 우연찮게도 1년에 딱 한 번 밤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올나잇으로 진행되는 백야 축제가 오늘이라는 사실이 우리 등을 떠밀었다.
시티 곳곳에 대형 건물을 활용한 레이저 아트쇼부터 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중 세계에서 제일 큰 파이프 악기 공연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왔다. 우리의 광장은 지금 진실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 중인데, 나는 이런 축제의 광장에 나와있다는 사실이 새삼 씁쓸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던 이 축제 덕분에 우리는 집에 12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오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첫날부터 삼촌을 피곤하게 했다. 열흘간의 조카 부부 방문으로 삼촌 부부는 강제 에어비앤비 호스트행. 여러가지 고마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집안일을 거들고 저녁 준비를 하며 최대한 밥값 하는 게스트가 될 것을 굳게 다짐한다.
그러니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