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보통은 언제나 맑음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호주 #멜버른 #현지교회 #가족비앤비

#2017년2월19일~21일


여행 중 처음 맞이한 주일 아침. 삼촌이 다니시는 현지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진 옷이 별로 없었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차려 입고 집을 나섰다. 차로 5분 거리에 있던 교회는 한국에서 보던 곳과는 사뭇 달랐다. 캐주얼한 분위기 속 목사님은 면바지에 셔츠를 입고 계셨다. 찬양과 기도에 이어 말씀이 이어졌다. 음.. 평소에 듣던 0.5배속의 친절한 영어가 아닌 8배속의 속사포 영어로 된 설교를 들으려니 약간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른 여행자들이 보통 타국의 펍이나 클럽에서 외국의 개방적인 문화를 느끼는 것과는 달리 '교회'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그것을 느끼는 것이 꽤나 특별하고 좋았다.


예배가 끝나자 숙모는 우리에게 교회에서 운영하는 영어 교실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흔쾌히 가겠다고 대답했다. 학생들은 주로 중국인 할머니 할아버지. 다들 간단한 간식 한두 가지씩을 챙겨 오셨다. 나도 숙모가 손에 들려준 감자칩과 크루아상 봉지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른 간식들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 할머니가 만들어 오신 중국식 만두가 정말 맛있었다. 이것 때문에라도 다음 주에 한번 더 이 곳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즐거운 간식 타임이 끝나고 선생님 한 명에 학생 둘셋씩 묶어 모둠을 만들었다. 우리 팀은 나와 남편 그리고 이제 15살이 된 꼬마 선생님으로 구성되었다. 말레이시아계 아이였는데 차근차근 참 잘 가르쳐주었다. 아무래도 먹는 것이 주제여서 그랬던 것 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먹는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우니까 말이다.

< 에어비앤비보다 열배 좋은 가족비앤비 >

영어 공부방에서 2시간가량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이 우리에게 배당된 침실이다. 세상 편하고 넓고 아늑하다. 주방에 나가면 언제나 신선한 과일들이 준비되어 있고, 냉장고에는 다양한 식재료들이 준비되어 있다. 심지어 일본인이신 숙모는 우리가 온 날 무려 '김치'를 담가 주셨다. 늘 함께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김치의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서운하게 한 일이 있다면 잊어줬으면 좋겠어 김치야.'

<오늘 개업 했어요...가 아니라 요리 했어요>

시티나 근처 구경을 나가지 않는 날은 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으며 차를 마신다. 그리고 여행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고,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에서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가끔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곳에서는 야근이 많으면 같이 저녁 식사 한 번 하기도 쉽지가 않은 삶이었다. 식사 한 번도 하기가 힘든데 대화는 제대로 나눌 수나 있을까. 아마도 그래서 한국의 부부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걸 지도 모른다.

<몸으로 웃김을 표현하고 계시는 아재님.>

때문에 우리는 이 여행을 빌어, 인생에서 이루어야 할 일련의 목표들을 잠시 내려놓고 단순히 서로에게 조금 더 집중해보려 한다.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할 때 반짝하고 빛나는 금니를 보고 '금 캐러 금광 들어가야겠다'라고 농담을 던지거나, 무언가가 지루 할 때 내 귓볼이 아닌 상대방의 귓볼을 만지거나, 요상한 춤을 추며 세상에서 제일 우스워 보이기를 자처하는 이런 사소한 행동들을 쌓아가며 함께 인생의 만랩에 도전해 보는 것이다.

<이 집들을 내가 어디서 봤나 했더니 미드에서 봤네>

4시 반쯤 되면 삼촌과 숙모가 퇴근하시고, 학교 갔던 6살 난 친척 꼬마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럼 다 같이 저녁을 먹고 해가 지기 전 동네 산책을 나간다. 넓은 땅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다들 잘들 살고 있다. 한참을 걷다 발견한 집 앞에 서서 '우리 지금 집 샀어요' 포즈로 사진을 찍어본다. 그리고 곧장 '우리 이 집 팔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요' 포즈로도 찍어본다. 별 소득 없는 짓이지만 볼 때마다 웃긴 건 왜 때문일까.

<1초 사이에 집을 샀다가 팔았다가.jpg>

삼촌과 사진을 보고 한참을 웃다가 숙모와 조금 지났지만 최근 Hot했던 드라마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용을 설명해주려니 아는 영단어를 총동원해야만 했다. 하찮은 영어 실력이지만 마이웨이로 열심히 뱉으면 얼추 대화가 되고 있다. 이 모든 영광을 미드 <위기의 주부들>에게 바친다.

<냥 팔자가 상 팔자.>

아, 그리고 오는 길에 또 고양이를 만났는데 여기 고양이들은 왜 이렇게 진취적인지 사람만 만나면 이렇게 쓰다듬으라고 벌렁 드러눕는다. 나는 동물 애호가는 아니고 보호가 정도인데, 이렇게 대놓고 쓰다듬으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쓰다듬게 되는 게 현실이다. 집사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매일 소소한 보통의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는 요즘이 감사하게도 더할 나위 없이 맑음이라는 사실이다. 나른하게 누워있는 저 고양이의 느긋함처럼, 그 위로 내려 앉는 노을의 따듯함처럼 오늘도 딱 보통만큼의 맑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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