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호주 #멜버른 #그레이트 오션로드
#2017년2월22일
새벽 6시 30분. 아직 밤의 자락이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전철을 타고 시티로 나섰다. 오늘 여행의 핵심은 그레이트 오션로드 Great Ocean Road. 도심에서 아주 멀고 또 길이 험해서 여행사의 일일 투어를 신청하여 다녀오기로 했다. 전날 투어 예약을 하며 안내받은 만남의 장소로 이동하던 중 남편의 커피 오더가 떨어졌다. 둘러보니 곳곳에 우리 같이 몽롱한 아침 기운을 덜어내려는 사람들이 커피를 사려고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찬찬히 분위기를 살피며 그들 틈새에 줄을 서서 커피를 주문했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우유가 들어간 카푸치노나 라떼를 즐겨 마신다.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면 블랙이라고 주문해야 한다.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어딜 가나 줄창 카푸치노만 팔길래 네이버에 검색해봤다. 하지만 네이버가 알려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블랙을 달라고 주문을 하니 미드에 나오는 주인공 같이 생긴 카페 직원이 롱 블랙인지 숏 블랙인지를 되물었던 것. 순간 당황했지만 왠지 숏은 아닐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롱으로 주문했고, 커피를 받자마자 뚜껑을 열어 확인했다. 휴. 다행히 우리가 알던 그 '아메리카노'가 맞았다. 나중에 디테일하게 검색해보니 숏 블랙은 흔히 말하는 에스프레소였다. 휴휴. 아침부터 사약을 마실 뻔했다.
커피를 들고 짧은 다리로 잰걸음을 걸어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45인승 대형 버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께 어느 쪽이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이냐고 물어보고 왼쪽에 맨 앞자리에 앉았다. 전에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 남부 투어를 갔을 때 아무 데나 앉았다가 그 멋진 풍경을 다른 사람 뒤통수 넘어로만 봐야 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뒤 20대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탔다. 그들은 아직 왼쪽에 자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쪽에 앉았다. 갑자기 나의 오지랖 레이더가 발동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난 뒤부터 나는 오지랖 레이더에 불이 들어오면 꼭 남편에게 물어본다. 남편은 대부분 하지 말자고 대답하지만 내 마음은 늘 '한다'의 손을 들어버린다. '일부러 오른쪽에 앉으신 게 아니라면 왼쪽이 바다가 잘 보이니까 옮기시는 게 어떨까요?' 오지랖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들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 정말 필요치 않은 기술 중 하나이지만 때때로 나는 이런 오지랖을 부릴 때 마치 요술을 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좋은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한? 뭐 그런 것이다.
커다란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싣고 한참 동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첫 번째 포인트 메모리얼 아치. 그레이트 오션로드의 시작이자 길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념 장소 같은 곳이다. 이 도로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이 16년간 곡괭이를 가지고 한 땀 한 땀 만들어간 장장 243km의 어마어마한 길이의 해안 도로이다. 그들의 피땀 어린 노고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곳은, 이제 그들이 남긴 아름다운 풍경과 그것을 찾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아치 앞에서 가이드 아저씨가 1초에 한 명씩 기계적으로 찍어 주는 완벽한 관광객 버전의 사진을 남기고, 옆으로 난 작은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멋진 풍경의 바다가 나타났다. 구름은 머리 위로 흘러가고 바다는 발 끝으로 밀려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였고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많은 숨을 들이마셨다. 하늘과 바다와 구름과 순간에 관한 기억들이 몸 구석구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할 수 있는 한 가장 천천히 그것들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 속에 무언가를 받아들일 진짜 공간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여행은 언제나처럼 우리에게 가진 것을 버릴 기회를 준다. 월수금 정해진 시간에 내놓을 수 있는 종량제 봉투처럼 내 안에 묵은 생각들을 정기적으로 담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셈이다. 잘 버리고 잘 담는 일. 이번 여행을 통해 풀어내야 하는 큰 과제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차에 올라타 몇 시간을 더 가니 항구도시 아폴로 베이가 나왔다. 그곳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나 다름없는 12사도 바위를 보러 이동했다. 해안선을 따라 12개의 거대한 바위가 늘어서 있는 이 곳은 바람과 파도에 의해 2000만년 동안 깎이고 깍겨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침식으로 8개만 남은 상태. 그래서 사라지기 전에 꼭 봐야 할 곳 리스트에 올랐나 보다.
중요 포인트를 찍었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지라고 생각한 순간, 가이드 아재는 록카드고지Loch Ard Gorge에 한 번 더 버스를 세웠다. 날씨가 아침과는 달리 33도까지 올라가 너무 더웠기 때문에 안 갈까도 생각했지만, 언제 또 오겠는가 싶어 터덜 터덜 나무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난 비치를 만났다.
그늘이 진 쪽의 모래는 아주 시원해서 그 속에 발을 파묻으며 천천히 해변을 걸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차가운 바다의 감촉은 치킨의 '반반 무 많이' 보다 더 짜릿했다(읭?)
대략 30분 정도 아주 짧은 시간 머물렀던 곳이라 더욱 기억에 남는 록카드고지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하나 얽혀 있다. 호주에 골드러시가 한창일 때 록카드라는 배가 이곳 해안가로 접근하다가 큰 파도와 암석들 때문에 난파가 되어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 그중 단 한 명의 소년만이 살아 남아 이 해변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멀리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소년은 다시 한번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가 그 소녀를 구했다고. 근데 전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야 하는데, 이 스토리는 엄청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그냥 각자의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로 끝이 난다. 참 마음에 든다.
모든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아까 아폴로 베이의 슈퍼에서 발견한 엄청난 아이템을 꺼냈다. 바로 추억의 '짝꿍'과 꼭 닮은 Wonka Nerds Surf 'n' Turf라는 이름도 어려운 까까 되시겠다. 맛도 매우 짝꿍스럽고 오픈되는 방식도 매우 짝꿍스럽다. 한국에서 못 본 지 오래됐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다. 네네치킨 다음으로.
시티에 돌아오니 어둑어둑 해도 져가고 배도 고팠다. 하지만 늦게까지 하는 가게도 없을뿐더러 여비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전철을 타고 곧장 집으로 갔다. 10시쯤 집 근처 역에 도착하니 삼촌이 마중을 나와 계셨다. 그리고 집에 가니 맛있는 밥과 반찬이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따끈한 계란찜과 생선구이도. 나는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지금, 그들에게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볼 뿐이다. 그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