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호주 #멜버른 #나이트마켓
#2017년2월23일
그레이트한 오션로드로의 여정은 다음날의 늦잠으로 이어졌다. 천천히 일어나 모두들 나가고 없는 집에서 토스트를 만들며 올드팝을 틀었다. 언제나 그렇듯 흘러나오는 타이타닉 OST에 심장을 얻어 맞고 '캬' 하고 감탄을 내뱉는다. 초등학교 6학년인가 5학년 때 학원 선생님과 중학생 언니 오빠들과 함께 극장에 가서 타이타닉을 봤었다. 셀린디온의 애절한 노래가 깔리고 주인공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나는 장마 같은 눈물을 흘렸다. 콧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 희뿌옇게 입김이 서린 자동차 창문 위로 주욱하고 손이 미끄러져 내려가던 장면도 베스트로 꼽을 수 있겠다. 이렇게 어떤 노래는 생생한 과거의 기억을 불러 낸다. 참 흥미롭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저녁을 준비했다. 오늘의 메뉴는 오므라이스와 홍합 미역국. 참기름에 고소하게 볶아 낸 미역에 홍합 삶은 물과 홍합살을 넣은 뒤 보글보글 끓여주고 백종원님의 레시피대로 다진 고기 및 야채에 몇 가지 양념과 케첩을 넣고 밥을 볶는다. 마지막으로 계란을 풀어 넓고도 얇게 부치는 게 관건인데, 다섯 장 모두 찢어짐 없이 성공했다. 이렇게 내가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자 이제부터는 플레이팅이다. 어디서(김밥천국에서) 본건 있어가지고 굉장히 전문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우선 넓은 접시에 부친 계란을 깐다. 밥을 밥공기에 꾹꾹 눌러 담아 모양을 만들고 깔아 둔 계란 위에 엎는다. 밥그릇을 빼고 새로운 접시를 위에 덮은 뒤 신속하고 프로페셔널하게 뒤집는다. 좌우로 펼쳐져 있는 계란 이불들을 밥 밑으로 쏙쏙 넣어 모양을 잡아준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계란이 엄청 뜨거우니 잘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므라이스 마스터의 길.
다섯 접시의 음식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더웠다. 생각만큼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다들 맛있게 먹으니 뿌듯함에 배부르다. 보통 저녁을 먹으면 티타임을 갖지만 오늘은 빨리 정리를 마치고 다 같이 사우스 멜버른south melbourne에서 열리는 나이트 마켓에 가보기로 했다. 차로 한 시간 가량을 달렸을까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 온통 사람과 노래와 맛있는 음식과 들뜬 열기가 가득했다. '호주는 어딜 가든 축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켓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구경하던 중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빵 가게를 발견했다. 우리도 놓칠세라 줄을 서서 아몬드 페스츄리와 애플쨈 페스츄리 등을 샀다. 그동안 옆에서는 키가 크고 마른 할아버지와 키가 작고 통통한 할아버지 두 분이 쎄시봉이라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로 공연을 펼쳤다. 색소폰과 기타 비슷하게 생긴 멕시코 악기도 연주하셨는데 두 분 모습이 너무나 완벽한 2인조여서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두둠칫 두둠칫 몸이 움직였다. 잠시 흥을 가라 앉히고 근처 벤치에 앉아 방금 산 빵을 꺼내 물었다. 세상에. 아몬드 페스츄리가 너무 맛있다. 맛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와인 소믈리에들처럼 이 빵에 대해 디테일하고 아름다운 설명을 하고 싶었지만 나의 뇌는 이미 맛에 사로 잡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먹던 빵을 클리어 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켓 안에 있는 펍에 가려했지만 이미 모든 좌석이 꽉 찬 상태였다. 그때 남편이 맥주가 마시고 싶으면 집으로 가서 편하게 마시자고 제안했고, 모두들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호주는 일반 마트에서 술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술을 파는 술 매장이 따로 있다. 집에 가는 길에 들른 호주의 술 매장. 이 넓은 공간이 모두 세계의 다양한 와인과 양주와 맥주들로 가득했다.
호주에서만 판다는 크라운 라거나 향이 좋다는 칼톤 드라이 라임 등의 몇 가지 맥주들을 담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감자칩을 가득 담은 그릇과 함께 처음 보는 맥주 맛 테스트 겸 수다 시간을 시작했다. 남편이 두 번째 병을 땄을 때 병뚜껑 안에 크게 FREE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1초간 뭐야 한병 더 인가?라고 조금 들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방부제 프리. 에라이.
'거 방부제는 원래 안 쓰는 게 맞는 거 아니요?'(암살 이정재ver)
오늘처럼 별것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근처 시장을 구경하는 일들은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평범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은, 단순할수록 멋있는 것 같다. 어딜 꼭 가야만 하고 무얼 꼭 먹어야만 하는 여행도 좋지만 어디든 가도 되고 아무거나 먹어도 되고 때로는 일상 같은 일들로 채워도 되는 그런 여행. 이게 바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회사를 정리하고 나와 세계를 떠도는 일에 1년을 써버리고자 했던 소기의 목적이다. 아무래도 이 여행이 가지고 올 결말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어떤 실패도 어떤 성공도 서로가 서로에게 자랑스러워질 이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일상을 걷는다. 언제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