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호주 #멜버른 #차이나타운
#얌차 #모닝턴페닌슐라온천
#2017년2월
특별한 계획이 있는 아침은, 언제나 전날 밤으로부터 시작된다. 소풍 전날 밤, 개학 전날 밤, 결혼 전날 밤, 그리고 '얌차 yumcha' 전날 밤. '얌차 yumcha'는 홍콩의 차를 마시는 문화 중 하나인데, 차와 함께 딤섬이나 고기나 빵 등의 음식들을 함께 먹는 것이 특징이다. 차를 마시기 위해 디저트를 거하게 먹는 것인지, 거대한 디저트를 먹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것인지는 아직도 헷갈리지만 전날 밤 잠을 설치게 할 만큼 매력적인 행위이긴 하다.
특이한 점은 음식을 담은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원할 때 바로바로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준다는 것.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카트들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음식이 실려있는데,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가 원하는 게 보이면 잽싸게 달라고 하면 된다. 음식은 전반적으로 딤섬 종류가 많았고, 튀김이나 찹쌀로 만들어진 음식도 있었다. 식감이 매우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 호주에서 홍콩의 얌차를 경험한다니. 세상이 이렇게나 '지구촌'이 되었다. 올드한 단어지만 정말 온 지구가 하나의 촌이 된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을 어쩌겠는가.
차를 한 네댓 잔은 마시고 디저트를 가장한 거대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근처 시장 구경에 나섰다. 다른 시장들과 별 다른 점은 없었지만 한 가지 눈에 띈 아이템이 있었으니 바로 무지개 꽃이다. 꽃잎을 보호하기 위해 송이마다 망이 씌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풍성한 색감들은 일탈을 꿈꾸는 개구쟁이들 같았다. 이걸 가져다가 한국에서 팔아볼까 하는 생각에 검색했더니 이보다 못한 색감의 무지개꽃이 지난 밸런타인데이 때 중국에서 송이당 2만 원에 팔려 나갔단다. 그것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고. 그럼 우리나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가서 꽃을 사보도록 해야겠다.
분명 우리는 식사 같은 디저트를 먹고 나와서 또다시 커피번을 먹으러 갔다. 내 생각이 맞았다. 얌차는 식사였다. 그래도 나는 1+1처럼 위+디저트위로 구성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곧 번과 함께 먹을 음료를 고르는데 집중하게 되었다. 남편은 배가 부르니 한 잔을 시켜 나누어 먹자고 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이스 레몬 플럼'이라는 음료를 골라왔다. 맛이 오묘했다. 만약 내가 오줌을 먹어봤다면 '에이 오줌 맛이다 다음부터는 먹지 말자'라고 했을 정도로 희귀한 맛이 났다. 알고 보니 음료 속에는 검붉은 건자두가 들어있었고, 그것은 소금에 절여진 상태였던 것. 하지만 우린 이상한 줄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더 먹어보며 최대한 그 맛에 익숙해져 보려 노력했다.
어쩌면 '맛'이라는 것도 우리 머릿속에 저장된 지겨운 편견일 수 있다. 여행을 하며 다양한 나라의 수많은 맛들을 만날 텐데 그때마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모두 배척하는 건 새로운 경험에서 스스로를 배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넓은 의미에서의 성장을 위해 눈도 귀도 코도 입도 머리도 마음도 모두 열어 두는 일. 낯설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 중 하나이다.
두둑하게 채워진 배와 신선한 충격을 받은 혀는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켓에서 산 물건들을 집에 내려놓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곳으로 갈 채비를 했다. '페닌슐라 핫스프링스 Peninsula Hot Springs'. 바로 한 여름에 즐기는 온천이다. 멜버른은 하루에 세 가지쯤의 계절이 모두 들어있다. 아침저녁으로는 매우 쌀쌀하여 재킷이 없으면 감기 걸리기가 쉽지만 한낮에는 30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한낮에도 그다지 덥지 않은 온천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수영복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우리나라는 일단 온천이면 넓은 공간을 먼저 떠올리는데 이곳은 자연 속 구석구석에 조그마한 웅덩이 같이 온천을 만들어 두었다. 산 꼭대기로 올라가니 현지인들한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HILL TOP POOL'이라는 경치 좋은 전망탕(?) 같은 곳이 나왔다. 몽골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저 멀리까지 시야가 탁 트인 풍경을 병풍 삼아 신선놀음을 시작했다. 탕은 8명 정도가 빙 둘러앉으면 꽉 차는 공간이어서 갑자기 워크샵의 꽃 마피아 게임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친밀감이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허물없이(?) 함께 앉아 몸을 풀겠는가. 삼촌 덕에 멜버른에서 참 다채로운 경험을 하고 간다.
대략 두 시간 동안 힐탑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하나하나 모든 탕에 들어갔다 나왔다. 뜨끈한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선선한 바람을 느끼는 일이 너무나도 평화롭게 느껴졌다. 온몸의 피로를 말끔히 벗어 내고 나니, 아침에 잔뜩 먹은 얌차까지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루비'라는 이름의 타이 레스토랑. 구글이 추천해준 온천 근처 맛집이라 그런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입에 한 숟가락 넣는 순간, 태국에서 10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맛의 팟타이와 비프 샐러드, 심지어 처음 먹어보는 그린 카레까지도 달면서 매콤한 맛이 흠잡을 곳 없었다. 남편은 이미 카레와 혼인신고하기 직전까지 간 것 같이 보였다. 리얼 러브였다.
밥을 먹고 가게 바로 앞에 자리 잡은 바다를 구경하러 갔다. 낚시 중인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물고기보다 어둠을 이끌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려는 태양의 마지막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바다 위로 끝없이 펼쳐지는 된장국 색감의 노을. 바람이 강하게 불어 머리가 산발이 되었지만 어찌 됐든 나는 이 풍경 앞에 오징어일 뿐이니 개의치 않는다. 과연 누가 이 자연의 '자연미'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마 그 어떤 것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위 남성의 감성까지도 아재 아재 하게 물들인 노을. 자비롭게도 자연은 우리에게 역광이라는 것을 주어 아재의 자세한 표정이 보이지 않게 하였다. 참 감사한 일이다. 사실 오늘 누리고 보고 먹고 즐긴 것들 모두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는 감당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온천 여행에 맛있는 태국 음식에 멋진 바다 구경까지. 모두 가족비앤비의 무한한 제공이 있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멜버른에서의 머묾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 받은 많은 배려들을 에너지 삼아 나도 앞으로의 길 위에서 누군가의 에너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크게든 작게든 내 삶이 언제든 그럴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