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가지런하게, 또 엉망진창으로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호주 #멜버른 #퀸빅토리아마켓

#그래피티 #2017년2월25일


한국을 떠나 올 때 짐을 줄이기 위해 나는 옷을 포기했다. 특히나 티셔츠는 단 세 장뿐이었는데, 새 두 마리가 그려진 반팔 티와 줄무늬 긴팔 티 그리고 줄무늬 칠부 티였다. 하지만 지금은 칠부 티 단 한 장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녹록치 않은 삶이다. 매일 빨아 입는 실시간 세탁 시스템. 다행인 건 덥고 건조한 날씨 덕분에 아침이면 뽀송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옷일지라도.


사실 이 눈물겨운 사연의 화근은 '나'다. 삼촌 댁에 도착하자마자 시드니에서 밀렸던 빨래를 몽땅 세탁기에 넣고 돌린 것. 그곳에는 양말과 흰색을 베이스로 하는 옷들과 '검정 바지'가 들어있었다. 검정 바지는 세탁기 속에서 나의 세장뿐인 티셔츠 중 두장을 죽은 회색으로 물들였다. 예쁘게 물들었다면 '오 좋은데?' 하고 입었을 텐데 이건 마치 티셔츠를 흑백 복사한 종이로 만들어 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치열한 토너먼트를 거쳐 여행을 함께할 최종 티셔츠들로 선정된 것들이었는데....이렇게 멜버른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기별하고 만 것이다(도깨비ver).

<사진빨 잘 받는 전사한 티셔츠들. 실제로는 더 참담함.>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한 장의 티셔츠는 너무 무리였다. 그래서 구경 겸 티셔츠 구매 겸 멜버른에서 가장 오래된 퀸 빅토리아 마켓Queen Victoria Market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무려 1859년에 문을 연 이 시장은 멜버른의 부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여는 시간이 요일마다 다르기 때문에 가기 전에 꼭 확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간 날은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느긋하게 아점을 먹고 12시쯤 시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쇼핑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설레는 마음으로 시장에 들어섰다. 각종 기념품부터 양털 관련 제품들과 어그, 인테리어 소품, 장난감, 과일, 채소 등 없는 게 없어 보였다.

<장기 여행자는 예쁜 쓰레기들을 살 수 없었다 엉엉>

10미터에 하나씩 집에 가져가고 싶은 소품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 모든 것은 짐일 뿐. 한번 만지작 댄 뒤 조용히 내려놓았다. 하. 내려놓는 삶. 그 끝은 어디인가. 잊고 잊혀지고 지우오오오오(임창정ver).

정신을 놓고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우리가 이곳에 온 작은 목적이 생각났다. 내 티셔츠! 그렇다 나도 무언가를 사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룰루 랄라. 저 멀리 옷이 잔뜩 쌓여있는 가판이 보였다. 거의 경보에 가까운 빠르기로 가보았더니 호주 관련 이미지들이 프린팅 된 5달러짜리 티셔츠였다. 가장 무난 무난한 디자인과 컬러로 골라 몸에 대본 뒤, 구매는 이따 돌아가는 길에 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 30분을 더 구경했을까. 놀랍게도 다른 가판에서 아까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4달러에 팔고 있었다. 퀄리티도 동일했다. 예쓰! 1달러라고 해봤자 850원 차이인 것이지만 그래도 85만 원 절약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블랙홀이 캥거루를 먹고 있어요' 컨셉의 4달러 티셔츠>

득템을 하고 나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시장 밖에는 바비큐며 케밥 등 다채로운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심지어 회오리 감자까지 있었다. 우리는 흥겨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오늘 점심은 뭘 먹을지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시작했다. 이걸 먹네 저걸 먹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도미노 피자에 가기로 했다. 읭?ㅋ. 호주의 도미노 피자는 매우 저렴한 것으로 유명하다. 5.95 달러면 한판을 먹을 수 있다. 심지어 앱으로 미리 주문하고 찾으러 가면 5달러에 먹을 수도 있다. 맛은 아직 모르지만 가격이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날씨도 좋고 맛있는 것도 많은 빅토리아 마켓>

구글에 가장 가까운 도미노를 검색하고 한 10분 정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피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햄치즈 피자를 주문했다. 그리고 드디어 상봉한 피자.

오. 생각보다 퀄리티가 높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약 5천 원 정도인 셈인데, 베이컨도 적당이 바삭하고 도우도 쫄깃하다. 예산이 충분한 여행을 해도 이건 재미 삼아 한번 사 먹어 보길 추천한다. 가성비가 넘나 사랑스러우니 말이다.

<내 사랑 나의 사랑 도미노, 엄지 척!>

둘이서 피자 한판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뒤, 집에서 가져온 물 한 병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거리로 나가 어디로 향할지 고민했다. 잠시 검색 찬스를 이용해 찾아보니, 1869년에 세워진 로열 아케이드Royal Arcade라는 쇼핑센터에 빈티지한 분위기의 샵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는 없지. 마침 거리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냉큼 가보았다. 역시 멜버른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센터답게 입구부터 빈티지한 느낌이 물씬이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도 화보가 되는 멜버른>

이국적인 꼭두각시 인형 가게를 시작으로 여기가 한국이라면 냉큼 들어가서 샀을 법한 빨간 단화, 다채로운 컬러들로 한껏 치장한 초콜릿과 마카롱까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색감들이 온통이었다. 과거로의 여행을 하듯 천천히 가게들을 지나쳤다. 아, 여기서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모든 가게가 안에 작은 계단이 있어 복층 구조로 된 2층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가게 안에 알차게도 자리 잡고 있는 낡은 계단들. 이 또한 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피리라도 불어서 모두 다 이끌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진심 궁서체임.>

여기에 더 있다가는 등 긁듯 카드를 마구 긁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봐 얼른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니 문득 희대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멜버른 어딘가의 거리가 나왔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구글의 도움을 받아 구글구글 그곳을 찾아갔다.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른다는 이 골목. '미사 골목'되시겠다. 이제는 10년도 더 된 그 드라마를 빌미로 찾아오는 사람은 우리뿐이겠지. 허허.

<힙한 멜버른의 뒷골목. >

온통 그래피티로 뒤덮인 이곳은 아름답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비판과 찬양과 메시지와 상징이 다채로운 컬러에 뒤섞여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두서없이 겹쳐진 그림들 속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고, 누구보다 가지런하게 자신들만의 거리를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골목 한 구석에서는 남녀가 마주 앉아 레고를 벽에 붙였고, 또 다른 곳에서는 라카를 들고 나온 아티스트가 낡은 그림을 새로운 그림으로 덮었다.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듯.

<점점 닮아 가는 두 사람.>

시티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은 이로써 끝이 났다. 여행의 워밍업 공간으로 선택한 이곳에서의 시간도 이제 이틀만이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가족과 함께 했다면 앞으로의 길은 정말 우리 둘 뿐이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또 어떤 것들을 보게 될까. 그것이 나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주며,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까.'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이 꼬리는 잘라도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생각이 자라기 전까지 그 물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정당당하게 맞서 하나씩 답을 찾아보려 한다. 새 꼬리가 자라나는 그 순간을 자랑스럽게 맞이하는 도마뱀처럼 낡은 생각을 잘라내고 새로운 생각들을 장착하게 될 날들을 상상하며 오늘도 시간을 정리해본다. 가지런하게 또 엉망진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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