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그 저녁, 좋은 사람과 함께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호주 #멜버른 #보쌈 #순대간

#2017년2월26일


호주에서 맞이한 두 번째 일요일 아침.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목사님 말씀은 여전히 농담 부분을 제외하면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성경을 찾아보며 예배에 집중했다. 예배가 끝난 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티타임을 가졌다. 그 속에서 남편과 나는 이방인의 필연적인 어색함을 견디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우리 곁을 지나가던 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50대 정도 된 뉴질랜드 출신의

남자분이셨는데, 오래전 호주로 이민을 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 여행지로 발리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더니, '원숭이 조심하렴'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로스와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여행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아마 호주에 와서 현지인과 가장 긴 대화를 나눈 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영어 교실이지만 중국말만 들어서 중국 온 줄>

즐거운 대화를 마치고 영어 교실로 이동했다. 지난주보다 더 많은 중국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셨고, 지난번 만두보다 더 맛있는 부침개 비슷한 음식을 싸오셨다. 오늘은 간단한 율동이 들어간 영어 노래를 하나 배우고, 동물을 주제로 1시간 반 동안 공부를 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캥거루와 코알라에 관한 사실이다. 처음 영국 사람들이 호주에 와서 주머니에 새끼를 넣고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캥거루를 보고 '저 동물의 이름이 뭐니?'라고 물었는데, 하필 그 이름을 잘 모르는 원주민이었는지 '몰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몰라'가 바로 '캥거루'다. 그리고 코알라.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먹고사는 이 동물은 이파리 속 독성물질에 취해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잔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술이 떡이 된 사람을 꽐라라고 부르는 것 같다. 코알라 →꽐라.

<신침 나오는 비주얼의 보쌈 무김치.>

3시 반에 수업을 마치니 몸이 노곤노곤 해졌다. 집에 가서 낮잠을 좀 잘까 했지만, 반가운 손님이 저녁 식사에 올 예정이어서 잠을 떨쳐내고 냉장고 속 재료를 꺼냈다. 오늘의 메뉴는 보쌈. 한국에서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해 먹는 요리인데, 무를 채 써는 일 빼고는 매우 쉽다. 고기는 된장 푼 물에 양파와 마늘을 통으로 넣고 술도 좀 넣어준 다음에 한 2시간 푹 삶아주면 냄새 없는 보쌈 고기가 완성된다. 부위는 목살 추천. 그리고 같이 먹을 무김치는 손에 물집 잡힐 정도로 무를 채 썰고 거기에 고춧가루, 마늘, 설탕, 젓갈을 넣고 잘 버무려 주면 끝.

<야들야들 삶아진 고기도 먹기 좋게 썰어 내면 끝!>

그리고 순대 간은.... 나도 매번 사 먹어만 봤지 이렇게 직접 삶아서 먹어 본 적은 없었다. 고기를 사러 시장에 갔는데, 돼지 간도 떡 하니 내놓고 파는 걸 보고 삼촌은 재미 삼아 간땡이를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나는 순대를 사러 가면 순대는 한 두 개만 넣고, 나머지는 간으로 채워 달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 한 번 질리도록 먹어보자. 하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누군가가 블로그에 올리지도 않아서 그냥 보쌈 고기랑 같은 레시피로 1시간을 푹 삶았다. 그리고 결과는... 멜버른 순대 간 맛집 탄생. 고춧가루를 살짝 섞은 소금까지 함께 내놓으니 간의 정석이 되었다.

<멜버른에서 간을 삶아 먹게 될줄이야.>

준비는 장장 3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리고 찾아온 반가운 손님, 소미 언니. 나의 20대가 학자금 대출 상환과 함께 사라져 가고 있던 4년 전 어느 날. 점차 빚은 줄어 갔지만 나의 젊음이 함께 쪼그라드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받던 때였다. 때문에 더 늦기 전에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보자는 생각에 호주로 왔었고, 그때 삼촌을 통해 언니를 만났다.

<5시간동안 60여명의 이름을 한글로 써줌. 직접만 든 초&부채도 팔아서 기부잼>

이것저것에 관심이 많은 터라 언니에게 부탁해 멜버른에서 작은 마라톤도 뛰어보고, 선데이 마켓에 부스 하나를 마련해 한글 알리기 프로젝트도 진행했었다. 그때 난 영어를 지지리도 못하던 시기였는데, 무식이 용감이라고 추진력 하나는 끝내줬던 것 같다. 언니의 영어 도움과 숙모의 한복 지원으로 완성된 프로젝트. 어쨌든 한글 알리기 프로젝트는 나의 20대 사건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다.

<멜번에서 먹는 보쌈, 안 먹어 봤으면 말 못함>

오랜만에 만난 언니는 우리 품에 결혼 선물이라고 맛있는 샴페인을 안겨 주었다. 술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나였지만, 맛있고 비싸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삼촌과 숙모 말처럼 언니는 늘 베풂에 너그러운 사람인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난 이야기들을 꺼내며,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저녁. 그 여유로움 속에서 다가올 긴 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여행의 맛보기는 이제 정말 내일이면 끝이다. 그 어떤 때보다 용기가 필요한 지금 나는 그 어떤 때보다 용감하다. 우리를 사랑하고 지지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원기옥처럼 한 땀 한 땀 응원을 보내주고 있으니, 도저히 용감해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이 여행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는 이 여행을 시작했고, 또 끝낼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1년의 시간이 만들어줄 또 다른 색의 삶을 기대하면서. Y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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