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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캄보디아 #씨엠립 #태국

#방콕 #2017년4월2일~3일


압사라 앙코르 게스트하우스에 묵은지도 어언 8일째. 마지막 날은 주일날이기도 해서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아무 일정 없이 푹 쉬기로 했다. 잠도 자고 밀린 글도 쓰고 뒹굴거리며 하루를 보내는데, 1층 라운지 한켠에 앉아 계시던 사장님이 한국에서 새로 나온 커피믹스를 사 오셨다며 내려와 한잔 마시자고 하셨다. 산초 사장님은 갑자기 맹장이 터지는 바람에 잠시 한국에 다녀오셨는데, 다행히 우리가 떠나기 이틀 전 씨엠립으로 복귀하셨다.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건네주신 커피를 마셨다. 새로 나온 커피믹스는 엄청나게 맛이 없었다. 하지만 약 1시간 동안 나눈 산초 사장님과의 대화는 아주 아주 맛있었다.

<A9번방 아재의 쉬는 시간>

넓은 마당이 보이는 라운지에 앉아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초 사장님은 8년 전 우리처럼 회사를 나와 떠돌이 여행자 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쉼터로 삼고 싶은 나라들이 꼭 하나쯤은 생기는데 씨엠립이 사장님께는 그런 곳이었다고. 우연히 이곳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계실 때, 운영자가 '형, 나한테 여기 살래요?'라고 했고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냉큼 그러겠다고 하셨단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게스트하우스를 사고 1년간은 매일같이 '미쳤지. 내가 이걸 왜 샀을까'라고 생각하며 보내셨다고 한다. 그만큼 운영에 어려움도 많았고 늘 적자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 해 한 해가 고 내가 여행자라면 어떤 서비스가 필요할까에 대해 고민하니 천천히 문제들이 해결되어 갔고 이제는 한국보다 이곳이 더 편한 7년 차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되셨다.

<여행자들이 서로 만날 수 밖에 없는 오픈형 라운지>

산초 사장님 인생에는 여러 가지 목표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것이 '1년의 반은 놀고 반은 일하자'이다. 이렇게 큰 목표를 세워 놓고, 하위 목표들을 또 작게 세우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이루어 가는 것이 본인의 인생이라고 하셨다. 나도 이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계획의 연속이다. 보통 그 계획은 머리 속에만 세워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반복한다. 하지만 계획을 손으로 적어보고, 그것을 위한 작은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처음 세계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만 해도 그것은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되었고, 낡은 노트에 가보고 싶은 곳을 쭉 적어내려갔다. 그리고 적은 국가들에 대한 책을 구해다 읽기 시작했다. 나라별로 엑셀 파일이 하나씩 생겨났다. 간략한 이동 경로와 숙식비/활동비/교통비를 계산해 기입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세계여행에 관한 세부 계획이 천천히 세워졌고 1년 반의 시간이 흘러 꿈은 현실로 다가왔다.

<6개월간 책을 들추던 이때부터 이미 여행은 시작이었다>

지금까지 현실은 늘 잔인하게 꿈을 좌절시켜왔다. 그래서 참 많이 실망했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어떤 순간 기적이라는 것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 같다. 이 기적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다. 타인과의 비교보다는 자발적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순간. 나는 그 순간을 끈질기게 믿는다.

<여행 중엔 가족보다 더 반갑다는 세탁기와 햇볕 건조.>

산초 사장님과의 긴긴 대화를 마치고 밀린 빨래를 했다. 동남아 여행을 다니다 보면 매일 옷을 빨아야 하는 귀찮은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가장 더운 건기 시즌이라 땀이 비 오듯 주룩주룩 흐르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방 안에 빨래 줄을 매고 열심히 손빨래를 해서 널었지만, 이곳에는 세탁기가 있다. 무려 세탁기가. 세탁이 끝나면 해가 잘 드는 뒷마당에 널어주기만 하면 끝. 뽀송하게 마른 옷에서는 햇볕 냄새가 난다. 기분 좋은 냄새다. 갓 마른 티셔츠를 입고 동네로 어슬렁어슬렁 나가 점심을 먹었다. 선교사님이 추천해주신 채식주의 식당인데, 싸고 맛있고 실내가 매우 시원하다. 여기서 나오는 고추소스가 있는데, 오므라이스에 케첩과 이 소스를 곁들여 먹으면 정말 기똥차게 맛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녁도 이곳에서 먹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짜 맛있었으니까.

<무엇을 넣은게냐. 마법의 고추 소스!>

다음 날 새벽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국제 버스를 타고 방콕으로 긴긴 이동을 시작했다. 국경 넘어가느라 2시간 대기한 것 포함 10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방콕에 도착하니 저녁 6시 정도. 여행자 거리인 카오산로드에서 환전을 하고, 세븐일레븐에 들어가 유심을 샀다. 약 2만 원으로 30일간 무제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빵빵 터지는 인터넷으로 우버를 불러 미리 예약해 둔 숙소까지 이동했다. 아.. 왜 늘 저녁에 숙소를 찾아가면 이렇게 헤매고야 마는 것일까. 우리 숙소는 굉장히 작고, 무수한 주택가들 사이에 쏙 하고 숨어 있어서 우버 아재도 고생 좀 하셨다. 호스텔 이름이 'Tiny'일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어찌 되었든 겨우겨우 찾아 내렸는데 이번에는 문이 안 열린다. 하.. 주인장퇴근했으니 연락은 메신저로 하라는 메모가 붙어있었다. 메신저에서 주인장 이름을 검색했는데 안 나온다. 어쩔 줄 몰라하며 20분 정도를 서성이는데 이곳에 묵고 있는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겁나 애절한 눈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로 문을 열어주며 원래는 안 열어주는 게 맞는데 예약한 거 같으니까 열어준다고, 주인이 비번 안 가르쳐 줬냐고 물었다. 그래서 주인이 연락이 안 된다고, 어쨌거나 정말 고맙다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1층 라운지를 쭉 둘러보니 우리에게 주인장이 남긴 메모가 있었다. 하. 이봐요 이걸 안에다 남기면 어떻게 합니까. 밖에 붙여 줘야죠;;

<싼데 맛있고 색도 예뻐. 너란 망고 지나치게 완벽해. >

우선 짐을 풀고 땀을 조금 식힌 뒤,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다행히 숙소 근처에 시장과 편의점이 있었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 볶음밥과 볶음면을 시켜서 게눈 감추듯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45밧(약 1500원)을 내라고 한다. 뭐지. 화들짝 놀랄 만큼 싼 가격에 '역시 이래서 태국 태국'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게를 나와 편의점에서 물을 사고 걸어가는데 과일가게를 만났다. 봉지에 잘린 망고가 가득 들어있는데 20밧(약 700원). 먹자, 먹자, 먹자. 코쿤 카~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도 하고 숙소에 돌아와 주방에서 먹자판을 펼쳤다. 기절초풍할 정도로 맛있는 망고. 진심 감동적인 가격과 맛이었다. 살짝 덜 익은 망고는 같이 싸준 소금+설탕+고춧가루 믹스에 찍어 먹으면 오묘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난다. 반 정도를 먹고 내일을 위해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었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법한 비주얼의 로비>

숙소는 구석에 위치한 대신에 굉장히 깨끗하고 조용했다. 심플하면서도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1층 로비 입구는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아침에 빛이 들어오면 참 예쁘다. 침대도 넓고 침구들도 모두 깨끗하고 편안하다. 실내에서는 모두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더 집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위치만 조금 번화가와 가까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참 아쉽다. 우리는 이곳에서 딱 이틀만 머문 뒤 비행기로 라오스에 갈 예정이다. 그리고 새해 축제인 '쏭크란 Songkran'이 시작되는 13일경 다시 태국으로 넘어올 것이다. 나는 다시 왔을 때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만, 남편은 무조건 교통이 편한 곳으로 가자고 한다.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아 더더욱이나 아쉽다.

<예쁜 주방에서 망고 먹는 아재의 뒷모습>

내일은 라오스로 떠나기 전 하루간 방콕 맛보기를 할 수 있는 날. 로컬 버스를 이용해 시내로 나갈 생각이다. 돌아올 날을 위해 정말 살짝만 이 나라를 만나고 와야. 거리에 수많은 바퀴벌레와 하수구 냄새로 인해 방콕의 첫인상이 그다지 좋진 않지만 모든 여행이 그렇듯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말이 절실하게 생각나는 밤이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오늘보다 더 사랑스러울 내일의 방콕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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