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캄보디아 #씨엠립 #달란트시장
#팥빙수 #2017년4월1일
달란트 시장.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라면 누구나 일 년 내내 기다린다는 그 마성의 시장. 교회에서는 출석을 잘 하거나, 함께 하는 여러 활동들을 마치면 달란트라는 일종의 가상 화폐를 나누어 주는데, 그것을 모아 1년에 한 번 정도 열리는 달란트 시장에서 원하는 것을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과자부터 액세서리 장난감 학용품 및 생활용품까지 달란트만 많이 모았다면 그날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가 가능한 날이다. 하지만 우리 어린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하고 신중한 얼굴로 물건을 고른다. 아마 이날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번(?) 달란트를 사용하여 가족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봉투 속에는 고무장갑이며 양말 같은 것들이 으레 들어있기 마련이었다.
내가 다섯 살쯤에는 하필 이 달란트 시장 날에 수두에 걸려 눈물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우리 집이었던 관계로, 달란트 시장을 창문으로만 지켜보던 다섯 살 아이는 분홍색 수두약을 온몸에 바른 채 엄마를 시켜 색칠공부 하나를 사 오게 한다. 그리고 얼마나 소중했는지 누가 가져갈까 봐 등 뒤에 책을 숨긴 채 누워있었다. 때문에 색칠공부 표지는 분홍색 수두약 동그라미들이 여기저기 찍히게 되었고, 그게 달란트 시장에 관한 나의 가장 강렬한 기억이 되었다.
아침 일찍 선교사님의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오늘은 바로 그 달란트 시장이 열리는 날! 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니 이미 30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가 판매할 상품들을 진열하느라 바쁜 가운데 우리는 팥빙수 코너를 배정받았다. '시작'하면 꼬마 손님들이 러시아워처럼 모여들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으로 팥, 통조림 과일, 연유를 배치하며 만반의 준비를 바쳤다. 1년 장기 봉사자로 와있는 은찬 씨와 남편이 얼음을 갈아주면 그 위에 고명을 얹어 숟가락을 꽂아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나의 몫이었다. 우리는 시작 전 같이 셀카를 찍으며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잠시 뒤 그 여유는 각얼음과 함께 시원하게 갈려 사라지게 된다. 아듀.
선생님들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아이들은 질서 있게 쇼핑을 시작했다. 잠시 뒤 우리 코너 앞에도 한 무리의 꼬마 손님들이 줄을 섰다. 팥빙수를 맛보기 위한 손님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힘입어 열심히 제조에 임했다. 드르륵 갈린 한 컵의 얼음 위에 알록달록 통조림 과일과 오레오 과자 그리고 달콤한 연유를 듬뿍 뿌려서 건네면 어김없이 공손히 모은 손과 귀여운 '어쿤' 한마디가 돌아온다. 나는 스스로를 헌신적인 봉사에는 소질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길인 줄을 목회를 하시는 부모님의 삶에서 수 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원금을 보내거나 응원을 하는 것까지만이 내 몫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작은 감동들은 어제 보다 조금 더 이타의 방향으로 나의 등을 떠민다. 이렇게 조금씩 떠밀리다 보면 언젠가 나도 '이기' 보다는 '이타'에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몰려드는 손님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던 우리는 비지땀을 흘리며 공장처럼 팥빙수를 생산해 냈다. 꼬마부터 중고등학생까지 모두 하나씩 나누어 주니 얼음과 재료가 똑 떨어졌다. 그렇게 성황리에 코너를 마무리하고 뒷정리를 한 뒤 주방으로 향했다. 점심 준비가 한창인 주방에서 식판에 밥과 반찬을 담는 일을 도왔다. 나는 수박 담당. 밥 푸시는 분이 편하시도록 식판도 미리미리 가져다 놓았다. 오늘은 유독 밥을 더 받으러 오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건 그만큼 맛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찬은 어묵 볶음과 갓 튀겨낸 치킨! 커다란 솥에 기름을 끓여 바삭하게 치킨을 튀겨내는 모습은 소리부터 색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상황에서 냄새는 설명해 무엇할까. 나도 이렇게 침이 고이는데 아이들은 오죽이나 맛있을까 싶었다.
내가 손 빠른 선생님들과 함께 급식 나누기를 할 동안 남편은 교장 선생님과 설거지를 시작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신다는 교장 선생님. 역시 어떻게 찍혀야 예쁜 지도 잘 알고 계시는 듯하다. 아이들이 하나 둘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니 드디어 우리에게도 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봉사자들과 선생님들이 한데 어우러져 밥을 먹었는데, 반찬으로는 잡채와 닭볶음탕과 김치 그리고 아까 튀긴 치킨 등을 주셨다. 진짜 진심 진정 맛있었다.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뒤 리치로 만든 음료 한 캔도 다 마셨다.
바쁜 시간 뒤 뱃속이 든든해지니 마음까지 노곤 노곤해졌다. 그때 선교사님께서 뒷정리는 나머지 사람들이 하면 되니 숙소로 데려다주시겠다고 하셨다. 가는 것이 도와드리는 것 같은 분위기여서 모두에게 인사를 드리고 차에 올라탔다. 숙소에 돌아가는 길 문득 오늘이 남편의 생일이라는 것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침에 간단히 축하 치레를 하긴 했지만 혹시나 서운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특별한 하루를 보낸 것이 본인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는 남편의 말은 오늘 하루를 정말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음이 착한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더 착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인 것 같다. 비록 어제오늘 단 이틀뿐이었지만, 작은 노력이 누군가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고, 우리는 아주 조금 더 깊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의 깊이만큼 나눔이 차오를 수 있도록 오늘도 천천히 자라 가고 있다. 여행과도 같은 삶 속에서, 느리지만 한 발 한 발 꾹꾹 내 딛으며 우리가 만든 길 위로 한치의 후회도 없이 그렇게 자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