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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블루라군 가는 길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라오스 #방비엥 #블루라군

#2017년4월8일


출근을 위해 일어나고, 출근을 위해 잠들지 않은지 두 달이 되어간다. 느지막이 일어나도 불안할 것이 없는 하루. 하고 싶은 것은 있어도 꼭 해야 하는 것은 없는 날들이 마음에 안정을 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내가 이런 삶을 살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는 늘 포기가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만족이나 여유, 행복 같은 것들은 잘 감추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돈 빼고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지금이 좋으면서도 종종 어색하다. 만족과 여유를 지키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내놓는 삶.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지만 포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것들을 '포기'가 아닌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기회비용은 존재하고,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내가 가진 한계로 최대한의 행복을 만드는 일.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카레 매니아 강황 상봉기>

오늘의 아점은 꽃청춘 나PD 일당들이 3일간 해장하러 들렀다는 까오삐악집. 하지만 심하게 더운 날씨 때문에 결국 그냥 가까운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도 역시 한글 패치가 장착된 메뉴판이 곳곳에 붙어있었고, 카레 볶음밥 강추라고 쓰여있길래 까오삐악과 함께 주문해 보았다. 쫄깃한 면발이 끝내주는 까오삐악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오뚜기 카레 맛이 나는 볶음밥은 정말 취향 저격이었다. 선풍기도 없는 식당에 앉아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오토바이 대여를 위해 렌트들을 돌아보았다.

<오늘의 애마, 너로 정했다>

군데 돌면서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제 같이 카약킹을 했던 히로상이었다. 좁좁은 방비엥 시티에서는 어제 본 사람 또 만나고 또 만난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나는 일본어 패치가 장착 된 남편을 통해 어딜 가냐고 물어보았다. 자기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이고 일행들은 각자 쉬고 있다고 했다. 나는 휴대폰을 들이밀며 페이스북 친구 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히로상은 흔쾌히 아이디를 알려줬고, 간간메신저를 주받기로 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우리는 렌트를 하러 히로상은 밥을 먹으러 각자의 갈 길을 갔다.


오토바이는 밤부 레스토랑 근처 큰 렌탈에서 저녁 7시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6만낍(약 8,400원)을 내고 빌렸다. 남편 생의 첫 오토바이 라이딩. 안전을 위해 주인아저씨한테 약간의 강습을 부탁드렸고, 남편이 강습을 받는 동안 나는 가게에 앉아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훑봤다. 잠시 뒤 모든 기술을 습득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타난 남편의 지휘하에 블루라군으로의 머나먼 여정이작됐다. 야, 타!

<블루라군 가는 길. 엉덩이는 감각이 사라져가고.>

블루라군으로 향하는 길은 평화롭기 그없었다. 무리 지어 이동하는 소떼들, 손을 흔들어 주는 마을 아이들, 흥겨운 노래에 맞춰 추는 사람들까지. 누군가의 일상이 한편의 영화처럼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시간의 제약 없이 천천히 원하는 곳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이저곳 기웃대며 우연한 순간들에 감탄도 하고 멋진 산세도 감상하고 말이다. 그렇게 몇 개의 다리와 몇 개의 마을을 지나니 어느덧 블루라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루보다는 그린에 가깝다>

블루라군은 이미 더위를 피해 시원한 물놀이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토바이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물가로 다가갔다. 읭? 이 정도면 블루가 아니라 옐로우 라군 아닌가ㅋ. 물은 생각보다 깨끗하거나 예쁘지 않았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서 그런지 약간 그린과 옐로우 사이 어디쯤의 색을 띄었다. 그래도 들어가니 계곡물 특유의 시린 듯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남편은 용감하게 15m 높이의 나무 위에 올라가 다이빙을 했다. 나는 수영을 잘 못하는 관계로 구명조끼를 빌려 입고 나무 손잡이 그네에 매달려 라군 중심부에 퐁당 뛰어드는 것만 세 번 정도 했다. 그것만 하는데도 처음에 얼마나 떨리고 무섭던지, 한 백만 번은 망설인 것 같다. 그러다가 한 8살쯤보이는 아이가 하나도 무섭지 않다며 시범을 보여주어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고마워 꼬마야ㅋ.

<날다람쥐와 원숭이 오마주>

시간 반 정도 물놀이를 하다가 너무 추워서 물기를 대충 닦고 떠날 채비를 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냥 가면 아쉬우니 블루라군3도 들렀다 가기로 했다. 방비엥에는 블루라군 포인트가 여러 군데 있는데, 우리가 간 1이 꽃청춘에 나왔던 곳이고 2,3,4,5 등은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물이 맑고 예뻐서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1보다 2,3,4,5에 많이 간다고 한다. 대신 라군에 가려면 비포도로를 달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1시간 동안 먼지를 잔뜩 마시며 엉덩이가 얼얼해질 정도로 흙길을 달려야 했다.

<예쁘고 평화로운 블루라군3>

블루라군3은 소문대로 1보다 훨씬 좋았다. 사람도 적고 물도 깨끗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놀았다가는 돌아가는 길에 어둠이 내앉을 것 같아 구경만 하고 다시 오토바이에 올탔다. 정말 정말 아쉬웠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아쉬움은 이곳에 다시 올 핑곗거리가 되어주기도 하니, 조금 남겨 두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애국가 나올 때 이 장면 본 것 같아>

'봤다'는 보람 하나로 다시 1시가량의 전쟁 같은 라이딩이 시작되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위에서 잘못 가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던 차에, 여행자 한 무리가 멈춰 서서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도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뒤를 돌아 보았다. 와.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앞만 보며 달리는 삶에서 이제 막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뒤도 돌아보며 그렇게 가도 되는 길을 어떤 두려움과 조급함에 줄곳 앞만 보며 달렸을까. 진짜가 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늦게 오는 것들을 기다려 주며, 주변도 살펴가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 더 노력해야지. 내려앉는 붉은 해를 배웅하며 오늘도 여행에게 하나 더 배워 간다.

<한글패치 장착 한 메뉴판>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갈 쯤 시티가 앞에 나타났다. 오토바이를 반납하고, 아까 못 갔던 꽃청춘 스탭들이 방문했다는 식당에 찾갔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는데, 백종원 아재가 해볶음밥을 추천했다고 쓰여 있었다. 언제 또 왔다 가셨지. 국민 레시피 개발자가 추천하셨으니 이건 꼭 먹어야지. 나머지 하나는 뭘 시킬까 고민하는데, 태국 팟타이처럼 라오스에도 팟라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원한 수박주스도 하나 추가. 잠시 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끈한 음식들이 나왔다. 팟라오에서는 엄청 맛있는 그린 커리 맛이 났다. 그리고 백아재 추천 볶음밥은 정말 볶음밥 계의 끝판왕이었다. 꽃청춘 스탭들이 해장으로 먹었다던 까오삐악은 먹지도 않고 다른 메뉴들의 매력에 빠진 채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핵 맛있는 팟라오와 볶음밥>

든든하게 저녁도 먹었겠다 이제 빨리 집에 가서고 자야지하며성큼 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남편이 고개를 돌려 '어?'라고 단발의 의문을 내뱉었다. '뭐지?' 하고 나도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어제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던 호주 노부부가 식사를 하고 계셨다. 우와. 정말 다 만나는 곳이구나. 오늘 어떻게 보내셨는지 물어보니 책도 읽고, 잠도 자고, TV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아주아주 게으르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셨다고 하셨다. 나는 크게 동의하며 여행에 게으름도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라고 거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는 뭘 했냐고 물어보셔서 블루라군에 다녀왔고 길이 너무 험해서 엉덩이가 사라졌다고 농담을 쳤다. 다행히 알아들으시고 웃어주셨다. 휴. 외국인에게 농담 칠 때가 가장 조마조마하다. 웃기려고 한 건데 안 웃을까 봐.


그래도 어제 헤어지기 전 연락처를 못 받아 아쉬웠는데, 참에 물어봐야지 하고 이메일을 여쭤보았다. 가끔 메일을 써도 괜찮겠냐고 했더니, 할아버지께서 '그래 언제든! 그리고 우리가 한국 여행 때도 연락할 수 있는 지?'라고 하셨다. 우리는 당연하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화해주셔서 감사하는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숙소로 향했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생기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매우 재미있다. 때문에 나는 이 여행에서 만난 인연들을 조금씩 가꿔보려 한다. 생김새가 나이가 사는 곳이 달라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여행'이라는 교집합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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