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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놀기] 이 밤의 끝을 잡고

2020년 12월 31일의 밤을 보내며

by 말쿡 은영

지난 연말, 무기력이 내 영혼을 삼켜, 크리스마스인지 연말인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사진첩을 무심코 뒤적이다 발견한 2020년의 마지막 날에 찍은 한 컷에 담긴 장면이 내 마음을 몽글몽글 움직이게 했다.

2020년 1월 20일. 코로나 확진자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날이다. 발생한 직후부터 한 두 달가량은 완전한 경계태세로 에탄올 4L를 비롯, 각종 소독제와 의약품, 비상식량 등을 바리바리 쟁여 놓았고, 온 정신을 가족의 감염 예방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그렇듯이 적응의 과정을 거친 후 점차 잦아들어 어느 지점에서 노하우를 체득하고 그럭저럭 살다 거의 1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돌아보면 지난 1년 동안 무엇이 있었나, 무엇이 나의 시간에 알알이 박혀 있는가 생각해 보아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12월의 마지막 날, 아무것도 없이 보내 버리는 것은 너무 섭섭할 것 같았다. 의미 있는 것들을 끌어 모아 어제인지 오늘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고팠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거쳤기에 서로에게 마음을 건네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꾹꾹 눌러쓰고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낭독할 때는 심지어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그 시간에 담아내려 노력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웃음) 어려운 시간을 거치며,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마음의 진동이 더욱 느껴졌던 그때.


구정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같은 의식을 진행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부모에게 쓴 편지를 여기에 옮겨 본다.





To 사랑하는 가족에게



엄마, 아빠. 한 해 한 해 제가 예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나서 엄마, 아빠의 훌륭한 성격을 본받을 수 있었어요.

항상 엄마께선 나를 진심으로 예뻐해 주시고,

아빠께서는 박명수 아저씨를 닮아 재미있으시고,

엄마는 그 자체로 자랑거리이고, 아빠는 다른 아빠와는 달리 신나고 이런 게 재밌구,

또 나를 많이 경험하게 해 주시고 재미있게 놀아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구구단 9단을 아빠 덕분에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엄마, 아빠께서 저를 사랑해 주시고,

그리고 저의 엄마, 아빠여서 영광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 00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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