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1일.
엄마는 2013년 6월 11일 쓰러지신 후 식물인간으로 쭉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나는 아직 엄마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듯하다.
아직 거기에 깊이 잠수해서 완전히 일체화가 된 다음 다시 서서히 분리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였다.
비록 육체는 사라졌어도 정말 특별한 엄마의 그 혼빨이 분명 어딘가에 있겠지?
엄마를 떠올리면 어떤 엄마와 비교해도 최고인 엄마이다. 누구나에게 엄마란 그런 존재이기에 '비교'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엄마는 인간적으로 '참 저 사람 괜찮아.'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내 입장에서 객관화라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고집스럽게 '객관화'해보자면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명.숙.'이란 사람의 진한 그 무엇이 늘 든든히 내 곁에 있어주었다.
언제나 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10살 때, 엄마 아빠의 이혼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지만 엄마의 배려로 더 이상 충격이 아니었다. 조금 불편한 정도였다. 그 불편함도 남이 알게 되면 좀 마음이 불편한 정도였지 아빠의 부재로 인한 생활적인, 사회적인 불편함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아마 딸들이 이렇게 최소의 충격, 최소의 불편함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모르긴 몰라도 엄마의 뼈와 살을 깎는 정신적 승리로 말미암은 것이리라. 단 한 번의 히스테리도 내 기억엔 없다. 자식에게 분풀이 화풀이했던 기억도 없다. 설사 있었더라도 아마 미미했기에 내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것일 게다.
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지지해 주셨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면서 애들 교육을 끝까지 시켜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부족하지 않게 오히려 풍족하게 지원해주셨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매 시기마다 중요한 걸 넣어주려 애쓰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대전엑스포를 제대로 경험케 해주시려고 미리 숙소 예약에, 아침 일찍 엑스포장에 돌진, 인기 있는 코너에 미리 줄 서기 등 엄마의 그 적극적인 노력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또한 대학 전공 선택에 도움을 주시려고 여기저기 견학 다녔던 것도 기억난다. 늘 신문이나 각종 자료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여주시며 '이게 좋다, 이걸 해보자.' 하셨다.
아! 다시 초등학생 때로 돌아가면, 계곡에 다른 가족들이랑 많이 놀러 다녔다.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기죽지도 않고(그 속을 지금의 나도 가늠이 안되지만, 순간순간 마음 다부지게 먹으려고 노력하셨을 게다), 아마도 딸들도 기죽지 말고 재미있게 놀라고 그 무거운 짐들 혼자서 바리바리 다 챙겨서 그리도 여행을 많이 데리고 다니셨다.
울 엄마 딸들 대학 졸업하고 한 시름 놓으셨다. 그전까지 직장 다니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그 티를 전혀 안 내시다가 나중에야 이야기하셨다. 98년도에 숙모가 엄마를 보고는 '얼이 반쯤 나간 사람 같다.'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눈 초점이 나간 것 같다.'라고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점집이란 곳을 처음 가봤다고 하셨다. 물가에서 떨어져 살으라는 점괘에 지도를 펼쳐 십자를 그려 교차점인 이천으로 이사를 하셨었다. 그때부터 집을 지어 홀로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셨고 당시에 뭘 해 먹고살까 한창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셨던 것 같다. 한 때 초등학교 도서관 사서 자리도 용케 구하셔서 제법 오래 실력을 인정받으며 다니셨다. 비즈 공예품을 정말 많이 만들어서 홍대 근처 플리 마켓에도 다녀가셨던 적이 있다. 그날 너무 안 팔려서 울 엄마가 안 되어 보였다. 너무 기죽지 말고, 딸들이 엄마 잘 받쳐줄 것이니 재미 삼아하시는 걸로 하시라 얘기했던 듯하다. 다 딸들에게 부담 안 주려고 뭐라도 해서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끝없이 한 데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내가 고3 때 엄마는 과감하게 투자해서 셀프 호프집을 여셨는데 홀랑 말아먹어서 2억 정도 날렸다고 하셨다. 그 당시 앞이 노랬다고 회상하시기도 했다. 근데 눈앞이 노랬던 티를 어찌 그리 안 내셨나 모르겠다. 그 정신력의 비밀을 나에게 알려주지 못하시고 가시다니 너무 아쉬울 따름이다.
엄마가 땅을 사서 각종 꽃과 작물을 정말 즐겁게 키우셨다. 인프라에 대한 욕심도 많으셔서 구석구석 엄마의 욕구가 드러나는 요소들이 퍼즐 끼워 맞춰지듯 들어서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양의 짐들이 테트리스처럼 정리되어 있었고,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거의 기억하고 있으셨다. 그 공간의 이름을 '예정 화원'이라고 내가 지어드렸는데, 그 이름도 마음에 들어 하시며 귀엽게 수용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 공간을 일구고 꾸미실 때, 삽으로 길을 내실만큼 목표를 세우고 하루하루 쉼 없이 개미처럼 일하셨던 모습. 작은 것에도 의미와 행복의 느낌을 가지며 진정성 있게 노력하셨다. 자신이 신나게 하는 일을 즐겁게 얘기하고 딸들도 그것에 공감하여주길 원하셨다. 제대로 함께 즐거워하지 못했던 것이 죄송스럽다.
엄마는 늘 프로젝트가 있었다. 오늘 이 돈을 투자해서 내가 이렇게 행복하니 이 돈이 아깝지 않은 것 아니냐고 하셨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 다양한 시도와 고군분투를 많이 하셨으리라. 그것을 일일이 모두 자세히 듣고 맞장구를 충분히 못 쳐 드린 것 같다.
우리에게 즐거움과 도움을 주려고 늘 깨알같이 노력하셨다. 본인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계획을 세우고 정진하는, 허투루 시간을 쓰는 법이 없는 엄마였다. 우리 엄마의 야무지고 귀여운 손이 기억난다. 칼질을 해도 머리를 묶어도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도 어찌나 손에 착 달라붙는지 야무지고 똑똑한 손이었다. 뭘 해도 이치를 알고 머리를 써서 슬기롭게 하셨다. 난 귀찮아서 생각을 하다 말고 '에라이 모르겠다.' 할 때가 많은데 엄마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인생에, 자신의 시간에 비겁한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 리본을 너무 예쁘게 잘 묶으셨는데 그것을 제대로 배웠어야 했는데..
나의 직장생활도 아마 엄마 성에 늘 안 찼을 텐데, 늘 원하는 대로 하라 하셨지 잔소리 한마디 없으셨다. 중고등학교 때도 알아서 하도록 맡겨 주셨지 푸시하는 법이 없으셨다. 엄마로 인해 스트레스 받고 짜증 났던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화가 마렵다고 하면 바로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눠 주셨다.
자식을 키우면서 힘든 지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엄마는 어찌 그리 분풀이 하나 없이 우직하게 키우셨는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물어볼 수가 없다.
아득해져 가는 우리 엄마..엄마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아득해지기 전에 보내어야 하는가, 아득해지며 보내어지는 것인가.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