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일찍 '젠더리스'를 만났더라면
나를 표현한다.
이 개념을 계속 곱씹을수록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제대로 갖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전에,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좀처럼 만나지 못했기에 표현할 대상('나')에 대한 파악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 먼저겠다. 내가 Z세대로 지금 이 세상을 다시 산다면 정말 한 건 했을 것 같은데, 나의 ‘재기발랄’ 유전자를 제대로 발현시키기에는 현재의 에너지 레벨이 너무 떨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현실적인 제약을 극복하기도 어렵다(돌볼 일들이 너무 많다). 나를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끌리는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필요하니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 않겠나.
1977년에 태어난 나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면서 잘 살고 있는 편이라고 당시에는 생각했으나,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무너진 삶의 프레임을 다시금 세워 올릴 내 삶의 주춧돌과 돌기둥을 구성할 가치들에 집중하게 되면서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엔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르침들이 정답인 줄 알았고 그에 순종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고, 일반적인 것, 사람들이 대체로 용인하는 것 내에서 살면서 굳이 도드라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세상이 나를 그렇게 세뇌시켰다는 생각에 진짜 '나'로써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모범생 끝판왕(이것은 일종의 콤플렉스이다. 알 수 없는 울분을 담아 쏟아내듯 선택한 단어이다.)이었던 나는 선생님에게 책잡힌 기억이 거의 없다. 당시 나는 예의범절, 스승에 대한 복종, 규율 엄수, 만인에 대한 친절 등 누구나 생각해도 옳다고 여기는 일률적 적용 대상의 법칙을 지키며 욕먹지 않기 위한 삶을 열심히 살았다. 심지어 나는 군대를 가면 정말 잘 맞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물론, 대학에 가 ‘각성’이 일어난 후, 잠자고 있던 ‘반골’ 유전자가 발현되어 턱도 없는 생각이었음을 알았지만 말이다. 제도적 억압이 그 긴 시간 동안 나의 본모습을 저 아래 붙잡아 둘 수 있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특히, 여학생이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으로서 단정한 단발머리, 날티 나지 않는 머리핀, 깨끗한 흰색 양말과 살구색 스타킹, 깨끗한 검은색 단화, 속바지를 포함한 각종 속옷 등을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엄수하는 것에 대해 가진 자긍심은 더더욱 나를 그 틀 안에 가두어 놓았다. 그나마 그래도 그때는, 여학생스러운 가치에 더하여 적정선의 씩씩함과 능동성이 채택되는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나는 소위 ‘중성적’이라 일컬어지곤 했던 행동양식을 효과적으로 취하며 스스로 차별화되는 전략을 취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멋있는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 방식이 나에게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준 것은 아니었고 여느 여학생들과 조금은 다르면서도 모범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나름 만족을 하는 정도였다.
나의 또 하나의 자아는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이 별로 없었기에, 중성적 행동양식을 택하는 가운데, 패션코드 역시 중성적 영역과 여성적 영역 사이의, 중성적 영역에 좀 더 가까운 곳에 정착하였다. 유행은 잘 살펴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나다운 뚜렷한 에지edge가 딱히 있지도 않았다. 사십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같은 그 지점 어딘가의 표현양식이 나다운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오고 있는데, 엄밀히 따져보면 과연 이것을 내가 선택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기 때문에, 익숙함이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이어지며, 나름 나만의 매력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었기에 나의 것으로 생각하며 살게 되었다.
같은 맥락으로 전공도 ‘여자스럽지’ 않은 공대를 선택했다. 마켓에 대한 전망이나 나의 적성은 별로 고려치 않았다. 비슷한 성향의 엄마가 제안해주신 곳이었다. 아까 얘기되었듯, 대학을 다니면서 자아를 각성케 된 나는 오히려 사회학과나 신문방송학과가 더 나았겠다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대학 졸업 후 선택한 대학원, 이후 직장들에 대한 선택들 모두 헤매는 과정 상에 존재해오고 있음을 느낀다.
이처럼 ‘여자스럽지’ 않은 쪽으로 조금 옮겨진 선택들을 해오며 나다움에 제대로 근접하지도 못한 채, 그러면서도 젠더 편향적 기준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된, 어쩌면 이미 선례가 있는 한도 내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90년대 당시 다니던 학교 내에서 진행되었던 한 문화 운동에서 ‘거울을 깨는’ 퍼포먼스가 행인들의 자유 참여로 진행된 적이 있었다. 사회로부터 부여된, 강요된 젠더를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깸으로써 깨어버리자는 의미였다. 당시의 방식은 억압과 강요를 자각하고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었다. 불만과 투쟁의 에너지로 이어졌으나 대안적 문화의 제안은 아쉽게도 접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 나의 삶의 적용될만한 선택지들을 제공받지 못하였고, 문제의식만 남은 채, 나 자신에 큰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무언가를 바꾸기 위한, 틀을 깨기 위한 노력은 매우 가치롭다. 그것이 전제되어야 다음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근본적으로 갈급한 것은 ‘내가 나 스스로 멋지다고 여기는 것’이다. 과연 내가 편안해지고, 즐거워지는 나의 스테이지는 어디인가? 어떤 의상과 분장을 하고 어떤 무대에 서야 내가 스스로 멋지다고 여길까? 나의 ‘일’을 아주 길게 지속하기 위한 가치와 명분을 강력하게 세워나가는 지금의 과정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는 길을 걷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고 나를 다시 찾아가고 있다. 어쩌면 지금 나는 어떤 ‘젠더’에 속하지 않은 온전한 나의 표현방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Z세대가 고정관념을 다 떨쳐버리고 자신이 가진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자신만의 표현을 찾고 선택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물론 그 이면에 흐르는 혼란과 불안의 고통이 있음을 공감하며, 그 고통만큼 소리치고 있는 것임을 좀 알겠다고 감히 말해본다.
지금까지 갇혀 왔던 틀을 신경 쓰고 벗어나길 두려워하며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가. 반사회적이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이상,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여 실험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것에 쓰일 에너지도 달리는 마당이다. ’엄마’이면서도 ‘멋진 나’를 지켜내야 인생 후반부에 나 홀로 집에 처박혀 지내는 일이 없지 않겠는가.
사실, 나에게 집중하여 내 속을 휘젓고 다니면서 나라는 사람을 더 모르게 된 상태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 계속 무언가에 부딪혀야 한다. 부딪힘에 의한 반작용을 통해 나를 느끼고 찾아가게 되는 것임을 안다. 누군가의 말씀처럼, 어떤 시점의 내가 있기까지, 그 시점까지의 나의 모든 경험이 필요했음을 믿는 것이 중요하리란 생각이다.
‘젠더리스’는 기존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나’로부터 시작하라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선택은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라라레터> 14호 (2022년 5월 26일 발행)에 실었던 제 글을 재편집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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