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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안 Jan 08. 2022

경영지도사가 되다

학습

  이력서를 쓰다.

 이력서를 몇 개 썼다. 비영리단체들이었다. 가장 최근에 일한 것이 비영리단체이었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이력이 없어 말을 과장해야 했다. 비영리단체는 급여가 적기 때문에 이력서를 쓰면서도 안돼도 상관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일자리는 필요했지만 변변찮은 일은 하기 싫었다.

일주일에 하나씩 이력서를 쓰려고 했고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기독교계 비영리단체였다. 서울에 대형 교회였고, 일자리는 필리핀 지부 파견이었다. 몽골에 파견되어 지부 관리를 한 경험이 있고 국제개발협력 자격증도 있었다. 영어도 못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원했다. 그러나 내가 직전에 일했던 곳은 불교계 단체였다. 혹시나 해서 이력서를 냈는데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이 단체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조사를 해보니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일하려면 교회를 잘 나가야 하고, 모금활동도 잘해야 한다는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면접을 보러 가보니 교회가 있고 그 옆에 7층 높이에 건물이 있었다.

 면접관은 두 명이었다. 나를 면접에 부른 사람은 나보다 어려 보였다. 비영리단체는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일한다. 예상했던 질문들이어서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전에 일했던 곳은 불교 단체인데 왜 기독교 단체에 지원했냐는 질문을 받았다. 종교는 중요하지 않으며 국제개발협력은 뜻깊은 일이며 필리핀은 영어를 쓰는 곳이라서 지원했다고 말했다. 면접관 한 명은 대답을 듣고 다른 일이 있다고 나갔다. 뽑힐 가능성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 한 명은 계속 질문하는데 예의를 차리며 대화했다. 며칠 뒤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일자리는 간절했고 그렇다고 일하고 싶은 곳은 아니었지만 화가 났다. 모든것에 화가 났다. 내가 직접 면접을 보고 사람을 뽑기도 했었는데 내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공부를 시작하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력서를 쓰고 거절받는 일이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합격 통지가 오는 곳이 있었다. 한 번은 일본계 대기업에 합격을 했었는데 내가 거절한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꿈이 있었고 자신감도 있었다. 여러 번 직장을 옮겨 다녔고 옮길수록 월급이 낮아졌다. 그리고 39살이 되었다.

 기업에서는 나이 든 사람은 채용을 꺼린다. 회사 입장에서는 덜 숙련되었더라도 젊은 사람을 선호한다. 젊었을 때는 열심히 일하겠다는 열정만 보이면 취직이 가능했다. 나이가 들면 열정만으로는 안되고 회사에서 필요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 눈을 낮춰서 비영리단체 몇 곳에 지원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일을 안 하면 사회에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명함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교류가 줄어들었다.

 내가 가진 선택지를 고려해봤다. 막노동, 교육을 받아 취업에 도전, 창업이 있었다. 막노동을 하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니 최후의 지지선이었다. 경력을 바꾸거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학교를 가는 것은 2년이나 걸리고 전업으로 학교 생활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창업을 하고 싶었으나 아이디어가 없었다. 자격증 취득이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자격증은 학위와 비슷하게 나의 스킬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8대 전문자격증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관세사, 노무사, 감평사, 법무사, 노무사를 말한다. 전부 법률 관련 자격증들이다. 이런 자격증은 전공자들도 최소 1년 이상의 수험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국가 전문자격으로 분류하지만 난이도가 낮은 자격증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경영지도사였다. 중소기업에 경영 컨설팅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경영지도사 자격증 소지자들에 평균 수입은 8대 자격증에 못지않다는 통계도 찾았다. 40대 이상에서 취득을 많이 하는 자격증이란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 자격증을 취득하면 프리랜서로 일하던, 취업을 하던, 창업을 하던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하면 2년 이상 걸리지만 전업 수험생으로 공부하면 1년 내에 붙은 사람들의 후기가 있었다. 이때가 2월이었다. 1차 시험은 4월 말, 2차는 8월이었다. 7개월만 해보자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7개월 동안 자격증만 공부한다는 것은 도박이었다. 학위와 다르게 자격증은 불합격하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공부를 잘한다거나 머리가 좋다는 증거는 없었다. 시골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업 성적은 중상위권이었다. 간신히 지방대학에 진학했지만 졸업평점은 3.0/4.5점이었다. 1~2학년 때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는 닷컴 버블에 시대로 컴퓨터공학이 유망했기 때문에 전자공학을 선택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수학을 완전히 포기했었고, 공학을 배울 수 있는 기초학력이 없었다. 학교생활은 괴로웠다.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 내 주변에는 고학력자도 없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없었다. 어떤 걸 선택해서 배우고 어떤 직업 전망이 있는지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군대를 갔다 온 후로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다. 수학 공부를 하고 전공수업을 따라가려고 했었다. 4학년 때는 일본 IT취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어는 처음이었지만 수학을 배우는 것보다는 훨씬 재밌었다.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했고 히라가나부터 배워서 10개월 만에 일본어 능력시험 2급에 합격했었다. 그리고 일본 회사에 취업을 해서 다음 해에는 일본에서 1급을 고득점에 합격했었다. 일본어는 쓰지 않아 차츰 잊어버렸지만 그때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은 있다.


 2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4월 말에 1차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1차 시험은 6과목이었다. 중소기업 관련 법령, 경영학,  회계학개론, 기업진단론, 조사방법론, 영어였다. 내게 익숙한 과목은 영어뿐이었고, 1차 시험은 평균 60점만 넘으면 됐기 때문에 영어에서 고득점을 한다면 합격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2월에는 이력서를 썼지만 3월에는 이력서 쓰기를 완전히 멈췄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이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해서 일을 당장 시작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었다. 시험 합격 후기를 찾아서 읽었다. 가장 어려운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부하는 방법을 배웠다. 1차 시험에서 가장 어려운 과목은 회계학이었다. 회계학은 진입장벽이 있는 과목이었다. 합격을 위해서는 40점 미만의 과락 점수를 피해야 했기 때문에 회계학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1차 시험 교재로 1000페이지가 넘는 책 두 권을 구매했다. 기초 회계학 온라인 강의를 끊었다. 70여 개의 강의로 구성돼 있었고 이주일만에 다 들었다. 하루에 강의를 5시간 정도 듣고, 복습하는데 5시간 이상을 소모했다. 공부만 해보자는 생각에 계속 앉아 있었지만 공부가 된다는 느낌이 없어 답답했다.


이사하다.

 4월이 되어 서울에서 강원도로 이사했다. 생활비를 아끼고 싶었다. 오피스텔을 하나 찾았다. 신축 건물이었는데 월 42만 원으로 저렴했다. 나의 이삿짐은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뿐이었다. 최근 유행하는 미니멀리스트의 표본이었다. 한때는 많은 짐이 있었는데 지금은 가진 것이 없다는 걸 실감했다. 어차피 공부만 할 것이면 강원도가 좋을 것 같았다. 1차 시험에 합격할지도 확실치 않았다. 불합격한다면 그 이후의 계획은 없었다. 4월 초는 코로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시기였다. 모든 행사가 연기되고 있었다. 1차 시험이 4월에서 8월로, 2차는 8월에서 12월로 연기되었다.  다른 수험자들이 연기할 것을 민원을 많이 넣었고 받아들여졌다. 나는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결과를 알고 싶었기 때문에 연기된 것에 실망했다. 4월부터 12월까지 공부만 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여 공부만 하고도 불합격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수험 전략을 바꿨다. 시험에 최종 합격하기 위해서는 2차 시험에 붙어야 했기 때문에 1차 공부를 중단하고 2차 시험 책을 구매했다. 2차는 마케팅 관리론, 시장조사론, 소비자행동론이었다. 시장조사론은 통계 문제가 있었다. 통계 역시 진입장벽이 있는 과목이었다. 기초부터 확실히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통계 관련 책을 빌려서 읽으며 공부를 시작했다. 소비자행동론은 심리학과 사회학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학문이었다. 심리학 이론들은 공부가 재밌었다.


손이 떨린다.

2차 시험에서 가장 큰 걱정은 통계가 아니라 글씨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과목에 90분씩 백지에 답을 써내야 했다. 나는 악필이었고 글씨 쓰는 속도가 느렸다. 긴장하면 손이 떨리는 증상도 있었다. 논술 문제 답은 '입니다'와 같은 경어를 써야 하는지 '이다'와 같이 써야 하는지도 궁금할 정도였다. 대학은 나왔지만 공대라서 논술형 시험은 거의 안 봤다. 졸업평점 3.0이 었기 때문에 나는 서술형 시험을 보는 능력이 없었다.

 악필은 나의 많은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대학 친구는 내 글씨체가 초등학생이 잘 쓰려고 노력한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군대 있는 동안 글씨 쓰기 연습 책을 한 권 썼었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글씨 쓰기 책을 다시 한번 샀다. 선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로 긋기부터 연습했다. 동그라미를 예쁘게 그려보려고 했으나 계속 찌그러졌다. 시험에서는 글씨를 빨리 써야 하기 때문에 필기체가 필요했다. 필기체는 책의 후반부에 있었다. 하루에 30분씩 글씨 쓰기 연습을 했다. 주로 공부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음악을 틀어 놓고 글씨를 썼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연습 책으로 글씨 쓰는 법을 고쳐나갔다. 공부를 할 때도 흰 백지에 단어와 암기한 내용들을 가능한 쓰려고 했다. 펜은 1.0mm의 굵은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굵어야 보는 사람이 보기 쉽기 때문이었다.


 통계를 공부하다가 '사회조사 분석사'라는 시험이 있다는 걸 알았다. 기본 통계학 시험이라 경영지도사를 공부하면 덤으로 딸 수 있는 자격증이었다. 시험 보는 연습도 될 듯해서 응시했다. 필기시험은 객관식이라 고득점에 합격했다. 실기는 단답형 60점 작업형 40점이었다. 책을 따로 구입하지는 않았고 시장조사론 책을 봤다. 6월에 실기 시험을 보러 갔는데 시험 시작 직전까지 세 번의 설사를 했다. 교실 맨 뒤쪽에 앉아 있었다. 불안하게 시험을 시작했다. 시험 감독 한 명은 바로 내 뒤에 있었다. 단답형이라 한두 줄만 답을 쓰면 되는데 손이 떨렸다. 글씨가 써지지 않았다. 손이 떨린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내 뒤에 감독관이 내 손 떠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망상을 했다. 망상인 줄 알았지만, 나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손은 덜덜 떨렸다. 글씨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 시험은 떨어져도 된다고 되뇌며 복식호흡을 하며 안정을 찾으려했다. 소용없었다. 세 달 동안 글씨 쓰는 연습을 했고 명상도 했지만 내 몸은 나를 배신했다. 스무 명 정도 있는 교실에서 나는 거의 마지막으로 답지를 제출했다. 대부분 답을 아는 문제들이었는데 울퉁불퉁한 글씨 때문에 떨어질 것 같았다. 7월에 결과가 나왔는데 61점으로 턱걸이 합격이었다. 단답형은 28점밖에 못 맞았고 작업형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합격할 수 있었다. 작업형은 숫자와 단어만 쓰면 됐다. 글씨가 문제였다.  


 신경이 과도하게 예민하고 쉽게 불안해지는 정서적 성향이 있었다. 비이성적인 반응이었다. 손떨림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약을 먹거나 뇌에 전기자극으로 치료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는 기사들이 있었다. 정신과나 뇌신경외과에 방문하면 불안장애나 공황장애나 무엇이든 병명이 하나 나올게 분명했다. 일단은 경영지도사 2차 시험까지는 다섯 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더 연습하기로 마음먹었다.


공부를 위해 요가와 명상을 하다.

 글씨를 조금만 써도 앞팔이 아팠다. 악력기를 구입했다. 악력기를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전완근 운동을 했다.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지만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왼팔도 똑같은 횟수로 운동했다. 밖에 나가 버스를 탈 때도 악력기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팔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악력기를 쥐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세상과 고립되어 오피스텔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걱정됐다. 처음에는 하루에 푸시업 100개와 플랭크 1분을 했다. 100개의 푸시업은 3분도 걸리지 않았다. 한동안 쉬던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몸과 마음을 모두 단련할 수 있고 실내에서 하기에 적합한 운동이었다. 예전에 배운 것들을 떠올리면 요가를 하루 1시간 이내로 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요가 영상을 보면 내가 더 잘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도 요가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려볼까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않았다.

 요가와 더불어 명상도 거의 매일 했다. 명상은 불안을 줄이고 집중력을 높인다. 명상을 하면 공부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손떨림을 고칠 수 있을지 모른다. 계정만 만들어 놓고 거의 사용하지 않던 인스타그램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요가 자세나 명상하는 모습을 찍어 올렸다. 인스타그램은 내가 세상과 단절하지 않은 마지막 소통 창구였다.


1차 시험에 합격하다.

5,6,7월에는 2차 시험을 공부했다. 전업 수험생이었기 때문에 12월까지 한 가지만 공부하기에는 시간이 남는 것 같아 중간중간 다른 공부를 했다. <온실가스관리기사>, <토익 라이팅>, <사회조사 분석사>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8월 말에 1차 시험이 있었다. 2차 시험을 심도 깊게 공부하면 1차 시험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된다. 문제는 회계학이었다. 영어에서 고득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회계학에서 과락할 것 같았다. 8월 초부터는 회계학만 2주간 공부했다. 1차 시험을 통과해야만 2차 시험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한 달간 전력을 다해 공부했다. 3월~7월까지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효율은 좋지 못했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공부하는 방법을 찾는 시기였다. 다행히 8월에는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머리로 집중이 되었다. 회계학을 보는 동안 주위의 잡념이 사라지고 지식이 흡수되는 듯했다. 공부가 잘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75점까지도 나왔다.


 시험장은 서울이었다. 하루 일찍 올라가서 잠을 자고 시험을 볼까 하다가 새벽에 KTX를 타고 가기로 했다. 강원도에서 청량리까지는 50분밖에 안 걸렸다. 1차 시험은 객관식이라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됐다. 부담이 덜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길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회계학 공식들을 마지막 까지 외우면서 시험을 시작했다. 회계학 문제는 난이도가 높았다. 기출문제를 7년 치 풀어봤는데 난이도 변동이 있었지만, 이번 시험은 정말 어렵게 출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과목들을 빠르게 풀고 회계학 문제를 하나라도 더 풀려고 노력했다. 120분 동안 1교시 시험을 치르고 나니 과락은 아닐 것 같았다. 2교시는 첫 과목이 기업진단론이었는데 쉬웠다. 내가 빠르게 문제를 푸는 동안 옆자리에 대학생처럼 보이는 수험생은 시험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포기하고 나갔다. 영어는 따로 공부를 안 했는데 헷갈리는 문제가 몇 개 있었다.

 

시험을 끝내고 KTX를 타러 청량리로 갔다. 수험자 단톡방에서 사람들이 시험을 평가했다. 회계학과 조사방법론이 어려워서 망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푸념을 듣고 있자 보니 은근히 즐거웠다. KTX를 타고 강원도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반이었다. 급격히 초조해졌다. 단톡방을 나왔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공부만 했는데 1차 시험에 떨어진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답은 5시에 공개됐다. 집에 가지 않고 KTX역 대기실에 기다리다가 정답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두근거렸다. 회계학부터 채점했는데 55점이었다. 난이도 상승에도 불구하고 과락을 면했다. 전체 과목 평균은 78점이었다. 밀려 쓰지만 않았다면 통과였다. 다시 단톡방으로 들어가서 내 점수를 자랑했다. 회계학에서 과락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단 자격증 취득을 위한 첫 번째 허들을 넘었다. 안도감과 흥분감을 갖고 맥주 4캔과 음식을 몇 가지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시험 당일 설사할까 봐 아침은 굶었고 시험 중간 점심으로 빵과 커피만 먹었다. 맥주와 음식을 갑자기 많이 먹어서 위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려고 했지만 뇌의 스위치가 꺼지지 않았다. 이불을 덮고 누운 지 3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온 힘을 다해 달리다.

8월에 1차 시험을 보고 나서 12월 2차 시험까지는 100일이 남았다. 이제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8월에는 요가를 안 하며 공부만 하다가 변비가 걸렸었다. 계단 오르기를 30분 정도씩 하며 변비를 치료했다. 차츰 요가와 명상을 하지 않게 되었다. 30분 이내로 푸시업과 플랭크는 매일 했다. 짧은 운동이었지만 근육에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책상 위에 수험 전용 타이머를 갖다 놓았다.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의 하루 순공부시간이 8~11시간 정도라고 했다. 밥 먹고 화장실 갔다 오고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오피스텔로 들어온 이후 하루 10시간 정도씩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것은 쉬웠지만 문제는 집중력이었다. 공부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손이 가곤 해서 아예 휴대폰을 꺼버렸다. 매일 공부를 시작할 때 타이머를 누르고 화장실 갈 때 끄고 하며 공부하는 시간을 쟀다. 10시간 이상을 공부하는 날도 있었으나 그렇게 공부하면 다음날은 컨디션이 떨어졌다. 하루 8시간이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임을 알게 됐다. 일주일에 6일 공부하고 하루는 쉬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영화를 봤다. 일주일에 영화를 한편 씩을 봤고 전쟁영화 마니아가 되었다. 사람들이 죽고 죽이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이 영감을 주었다. 소모품처럼 죽고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의 개인적 삶을 상상해 봤다. 산다는 건 의미가 없다. 죽고 나면 다 없어진다. 30살까지 살던 90살까지 살든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 이런 허무주의적 생각은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불교의 반야심경에서 가르치는 공 사상도 일종에 허무주의라고 해석한다. 허무주의 관점을 취하면, 시험에 합격과 불합격은 똑같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다는 고교 동창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차단해 버렸다. 마치 경영지도사 시험에 모든 것이 걸린 사람이 돼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떨어진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부정적 생각이 수시로 날 괴롭혔다.


 실제 시험에서 쓰는 것과 똑같은 답지 1000장과 볼펜 50자루 샀다. 시험전까지 다 쓰는 것이 목표였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바로 답을 써 내려갈 수 있도록 연습했다. 손을 떨지 않고 쓰려면 일상처럼 연습하는 것이 방법이었다. 답지는 하루 10장~20장을 썼다. 펜은 2~3일에 한 자루씩 썼다. 세 과목을 돌아가면서 공부했고 10월에는 과목당 5 회독씩 공부를 했다. 처음 3 회독을 했을 때 내용이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고, 5 회독이 되자 관련이 없는 거 같던 세 과목이 서로 연결되어 이해가 되었다. 시험 보기 전날까지 과목당 10 회독을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4월에 처음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볼 때는 한 달 가까이 걸렸지만 시험 직전에는 하루에 책 한 권을 다 봤다.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 보니 시험 전날에는 단어만 봐도 책의 어느 부분에 있고 어떤 내용인지 떠올랐다. 11월부터 시험 전날까지는 하루 평균 순공부시간이 10시간을 넘었다.


12월 12일 결전의 날

시험 당일 새벽 4시쯤에 일어났다. 6시에 청량리 행 KTX를 탔다. 아침은 먹지 않았다. 거의 1년 동안 아침은 거르고 커피만 먹었다. 시험날 긴장해서 설사할까 봐 먹는 것을 조심했다. 고3 수능 시험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었다. 살면서 한 가지 일에 이렇게 공을 들여본 것은 처음이었다. 시험장에 1시간 일찍 도착했다. 내 자리는 창가 옆에 맨 뒷자리였다. 창틀 옆에 비상용 볼펜 두 자루 올려놓았다. 책에 밑줄 친 것들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훑어봤다. 교실에 사람들이 거의 다 차고 시험시간이 가까워졌다. 날이 추워서 손이 얼었다. 글씨를 서너 줄 써봤다. 감독관이 들어오고 책은 가방에 집어넣었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빠르게 답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다시 생각을 멈추려고 했다. 몸을 이완시켜야 했다.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했다.

감독관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경영지도사였다. 끝까지 한 글자라도 더 쓰는데서 당락이 결정되니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9시 25분 답지를 받아 이름을 썼다. 답지에 수험번호와 이름을 쓰는데 손이 떨렸다. 젠장할! 손에 힘을 잔뜩 주었으나 이름 두 글자가 써지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호흡을 크게 했다. 9시 28분 문제지를 받고 인쇄 상태를 확인했다. 여섯 문제였는데 1번 문제를 대충 읽어봤다. 시험이 시작하자마자 답을 써야 했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9시 30분 시험 시작과 동시에 문제지와 답지를 펼쳤다. 1번 문제는 뭘 묻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1~2번 문제는 각 30점이고 4~6번 문제는 각 10점이다. 1번을 망하면 시험 합격률이 떨어진다. 문제를 보자마자 답을 쓰는 연습을 지난 세 달 동안 했다. 공부하며 1000장에 답지 쓰는 연습을 했다. 답이 안 떠올랐지만 무조건 써야 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하려고 했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내 지난 1년간의 노력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난 역시 안 되는 놈인가? 포기하고 시험장 밖으로 나갈까? 죽고 싶었다. 알아볼 수 없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답지 한 장을 썼다. 문제에 대한 답도 아닌 걸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내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1번 문제를 간신히 쓰고 2번 문제를 풀었다. 2번은 중요한 문제라서 몇 번이나 써본 적이 있었고 확실히 아는 문제였다. 그러나 글씨가 안 써져서 내가 아는 것에 70% 정도밖에 못 썼다. 3, 4, 5번 문제도 아는 것이라서 답을 채워나갔다. 6번 문제도 1번 문제처럼 일종의 불의타였다. 수험생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문제가 나오면 불의타라고 부른다. 6번은 다른 과목에서 공부했던 내용이 떠올랐고 꽤 논리적으로 답을 썼다. 시험시간은 90분이었으나 답을 다 쓰고 보니 20분이나 남아있었다. 답지의 맨 앞장으로 돌아가 1번 문제의 처음 반 페이지를 X 표시를 긋고 뒤에서 다시 쓴다고 하고 맨뒤에 다시 썼다. 이렇게 답을 썼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차피 답지에 맨 첫 장은 알아볼 수 없이 글씨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맨 뒷장에 다시 글씨를 썼다. 여전히 손이 부들거렸지만 처음보다는 덜했다. 1교시가 끝났다. 최악의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2교시는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했던 시장조사론이었다. 배점이 높은 1~2번 문제가 지나치게 쉬웠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고급 통계까지 공부했었는데 책에서 기초 예제 수준의 문제가 나왔다. 처음 시작할 때는 손 떨림이 약간 있었지만 답지를 써나가면서 손떨림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2교시도 답지를 다 쓰자 1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30분간 점심시간이었다.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3교시 소비자행동론도 다 아는 문제였다. 손떨림은 없어졌다. 문제지를 펼치자 마자 빠르게 답을 써 내려갔다. 여섯 문제에 답을 다 쓰자 5분에 시간이 남아있었다.


집으로 가는 KTX에서

 시험이 끝나고 다시 청량리역으로 갔다. KTX 열차 안에서 쉬려고 눈을 감았지만 뇌는 여전히 각성상태였다. 1교시에서 죽을 것 같이 답답하고, 덜덜 거리는 손으로 안 써지는 글씨를 썼던 것이 떠올랐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교시 답지만 채점자들이 해독을 해준다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20년 12월 12일 토요일은 시험을 봤다. 그날은 나의 39번째 생일이었다. 3주만 지나면 나는 마흔 살이었다. 올 것 같지 않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20대에는 내가 마흔 살이 되면 뭐라도 돼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은 사회와 단절되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가진 것은 없었다. 오피스텔에 살면서 시험공부만 하다가 마흔이 될 줄은 몰랐다. 2020년은 가장 처절하게 몸부림 친 시간이었다. 주사위는 던저졌다. 시험에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신의 뜻이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신이 있다면 거대한 우주적 계획 안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갖고 태어났을 것이다. 신이 없다면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나는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 것이고 자유를 선고받은 것이다. 스스로 사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끊임없이 무엇가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총합이 내가 된다. 나는 누구인가? 명함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 사는지 알 수 없다. 집에 도착해서 혼자 맥주를 홀짝거렸다.

 

 시험을 보고 두 달이 지나 시험 결과 나왔다. 합격이었다. 평균 79점이었다. 걱정했던 1교시 점수도 65점이었다. 내 답지를 해독해 준 채점자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합격자들의 세 과목 평균 점수가 64점이었다. 합격자중 절반이 60~64점 득점했다. 등수가 나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나는 5등 안에는 들은 것으로 추정한다.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명함은 없지만 경영지도사 자격증이 생겼다. 누가 물어보면 나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생겼다. 경영지도사를 영어로 하면 Certified management consultant이다. <공인 경영 컨설턴트>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39번째 생일 날 덜덜 거리는 손으로 끝까지 글씨를 썼던 그 몸부림이 아름답다.


1000장의 답지 쓰기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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