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새월 Mar 29. 2023

감정의 완성

파벨만스(2022)





    파벨만스(2022)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묵직하게 담긴 영화다. 어떤 영화가 자전적이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일단 감독의 예술관이 생애의 일부분과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고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고통들 속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기쁨은 금상첨화처럼 영화에 거대한 임팩트를 형성한다. 원칙적으로, 이 정도만 만족해도 자전적인 영화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가 감독의 이야기가 담겼다는 말에만 그치는 경우도 있다. 한 단계 나아간 '자전성'이란 수식을 받으려면 감독의 네임밸류가 필요하다. 자전성은 궤도에 올라 평단과 관객들에게 인정을 받은, 이미 성공한 예술가들의 전유물이라는 소리다. '자전성'과 '감독의 이야기가 담겼음'은 같은 말이지만, 실제 용례를 살펴보면 의외로 냉혹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이야기,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해서 지금까지 온 이야기를 푼다는 행위는 필연적인 욕망에 가깝다.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를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가로서 성공해야 한다. 이 어쩔 수 없는 야박함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위대함이 시작된다. 자신의 가감 없는 이야기를 담는 것은 일반적으로 용기 있는 일이고, 멋있는 일이지만 그 감정적인 결심 이전에 이성적인 결과가 충분해야 그 진가가 흔들리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여러 작품으로 명감독이 되었고, 이 영화를 통해 그 위상의 최고점에 방점을 찍었다.   



    파벨만스는 자전성이 집약되었지만 전기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스티븐이 영화를 처음 접한 어렸을 적부터, 영화가 취미가 되고, 이윽고 업으로 선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쥬라기공원, E.T. 같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표작들을 만들게 된 자세한 비화는 담지 않았다. 즉 이 영화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고통을 포함한 어려움에 집중했지, 어려움을 딛고 주파한 성공의 이야기는 일절 늘어놓지 않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간절히 이야기하고, 그걸 통해 받고 싶었던 사람들의 인정은 자신의 성공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인정받고 싶어 했던 이야기는 가족들 사이에서 겪은 고통이다.


    파벨만 가족은 사실 안 좋은 가정이 절대 아니었다. 아버지는 돈 잘 벌고 배운 사람이었고, 어머니도 언어적인 부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술에 대한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 자식 간, 형제자매 간의 폭력도 없는 상당히 괜찮은 가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정에 대한 거부는 죄스러운 감정이 돼 버린다. 예술과 가정은 여러 방면으로 대립되는 세상이다. 현실의 영역에서는 돈 안 되는 일을 자식이 한다니 부모는 내키지 않고, 교양의 영역에서는 부모와 자식이 유의미하게 취향 얘기, 진로 얘기를 하기가 힘들다. 감정의 영역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다르기 때문에 가족들끼리 같이 보내는 시간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너무 뭉뚱그려 이야기했는데, 결론적으로 예술가는 자신의 부모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에게 서운함, 답답함, 외로움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하의 감정들은 통념적인 진리관에서 억하심정으로 전락한다. 별 문제도 없는 가정에서, 니(예술가 자식)가 엇나가고 있다고 손가락질당하고, 배은망덕하다느니, 자의식 과잉이라느니 같은 극단적인 감정들에 덮어써진다.


    실제로 예술가 자식이 좀 과한 경우도 많겠지만, 어쨌든 이 고통은 확실히 고통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신 이후에 세상에 공개했다. 이 이야기를 두 분이 살아계실 때 꺼내봤자 자신의 과거와 똑같은 종류의 고통이 엄습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물론 두 부모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공개한 것도 크겠지만, 어떠한 고통에 공개 가능한 시기와 조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실재하는 억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숙원 작품이었다. 마음속에 고이 기억해두고 있던 감정이 영화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파벨만스는 전기적인 특징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 영화는 '인생의 완성'이 아니라 '감정의 완성'이고, 파벨만스 속에서 파벨만일 수밖에 없던 한 소년은 훌륭히 자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돈 키호테처럼 칼춤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