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안쪽에 집중하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는 sony에서 호기롭게 제작한 애니메이션 극장판이며, 그 시각적 업적과 멀티버스 개념의 훌륭한 사용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 실제로 애니메이터들끼리, 본작에서 보여준 연출력은 cg애니메이션의 신지평을 열었다고 평했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여러 번 감탄한 부분이지만, 이 이야기는 딱히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그쪽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브런치에서 이 부분을 적확하고 충분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가 '어떤 스파이더맨 영화'인지 메타적인 관점에 집중할 것이다.
1. 기존의 완벽한 스파이더맨
히어로물 특유의 분위기를 트집 잡는 것이 아니라면,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는 발견할 수 있는 단점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현실의 삶과 영웅의 삶 사이에서, 계속 희생하고 얼버무려야 하는 스파이더맨의 서사는 단순한 영웅적 동기를 넘어서 철학적인 사색의 영역에 속해있다. 영웅 서사는 피상적인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감당하는 이타와 이타를 저버린 좌절의 대립에서 기인한다. 일반성을 넘어서는 능력을 겸비하며 탄생한, 양측의 극단적인 등장인물들이 맞서 싸우고, 관객들은 편향된 쪽에서 그 흐름을 즐긴다. 스파이더맨은 이 관점에서, 아이들 시선에만 맞춘 내러티브에 갇히지 않았고, 쾌활한 성격을 부여해 분위기를 마냥 무겁게 잡지도 않았다.
특성적인 요소도 훌륭했다. '거미'라는 이미지를 적당한 수준으로 추상화하면서 뉴욕 빌딩숲을 오가는 진풍경을 구축했고, 빌런들도 비슷한 기동력을 부여해 직관적이고 일관적인 액션 구도를 잡았다. 이렇듯 거의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진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는 만화 시장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올랐다. 그리고 MCU의 성공으로 여러 캐릭터들이 실사화되면서, 스파이더맨 실사 영화의 가장 큰 쟁점은 스파이더맨 자체의 만족도였다. 아이언맨을 비롯한 대부분의 히어로 캐릭터들은 디자인과 현실성의 충족을 실사화 결과물로 이룩해야 했다. 반면 스파이더맨은 예전 작품이어도 최신 작품과 디자인적으로 크게 차이 나지 않았으며, 방사능 거미에 물린다는 설정은 막연한 오컬트에도, 과도한 sf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를 정리하면, 스파이더맨 실사화가 다른 히어로의 실사화보다 훨씬 캐릭터 서사와 내면의 정당성을 크게 평가받는 입장이었고, 그 소관은 오롯이 팬들에게 있었다.
2. 스파이더맨을 위대하게
이 영화는 관객의 전유물인 평가를 영화 내적으로 끌어 오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줬다. 이 영화는 우리가 기존의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주목하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피터 파커인데, 그는 영화 초반부에 사망하고, 이제 막 능력을 인지한 마일스와 다른 차원의 중견 스파이더맨들이 활약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자주 봐온 '스파이더맨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그 스파이더맨의 근본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일스는 기존의 스파이더맨의 유언을 지키고자 다른 스파이더맨들과 같이 행동하고 싶지만, 다른 스파이더맨들은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능력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기존의 영웅 내러티브와 크게 다르다. 보통 힘을 얻은 주인공이 두려워하자 주변 인물들이 독려 혹은 강요하며 서사를 끌어가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변 인물들이 힘을 얻은 주인공을 부인하고, 그로 인해 주인공이 애써 모른 채 하던 두려움이 강화된다.
결국 이 영화는 누군가가 스파이더맨에 걸맞은 인물인지 다른 스파이더맨들이 평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스파이더맨의 위상을 극대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신박한 구조는 영화 후반부 마침내 제 소임을 다하는 마일스의 모습에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줬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위대하게 스파이더맨을 다뤘다고 생각한다. 개연성으로 보나, 분위기 차이로 보나 분명 더 위대한 스파이더맨 영화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처럼 스파이더맨이라는 관념을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이를 새로운 서사와 결부 지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는 아직 남은 두 편의 후속작에 달렸지만 말이다.
3. 한 단계 발전 시키는 마스크의 비애
결론적으로, 이 영화에서 굳이 멀티버스 개념을 다룬 이유는 상술한 구조 때문이지만, 동시에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효과를 발휘했다. 앞서 스파이더맨을 완벽한 히어로 캐릭터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는 영웅 서사라는 장르 안에서만 허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캐릭터는 말끔히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기 때문이다. 피터 파커는 평소에 무시받으며 살지만 가면을 쓰고 뉴욕을 날아다닐 때는 커다란 자유를 느낀다. 우리는 이에 공감할 수 있다. 우리도 평소에 우리를 짜증 나게 하는 사람과 요소가 있고, 현실적으로 이루기는 힘들지만 스파이더맨처럼 꿈꾸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희생정신 자체는 공감하기 어렵다. 소시민 입장에서 보나, 상류층 입장에서 보나, 스파이더맨의 희생은 스파이더맨에 몰입한 자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유익하지 않은 숭고함이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맨의 이타는 책임에서 기인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책임이 없으니, 외재적인 한계를 맞는다.
그런 스파이더맨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는 건 스파이더맨 자신뿐이고, 거울이랑 대화해 봤자 기형적인 자기만족에 불과하니,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을 차용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들을 유일한 거미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만나 존재를 깨닫고,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덕분에, 그들의 향후 행동은 이전과 같겠지만 내적으로 큰 위로를 얻은 것이다. 이 감정선을 주도하는 캐릭터가 마일스라는 스파이더맨 신참이라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상술한 스파이더맨의 애환을 중견 스파이더맨의 관점에서 연출하면, 감정의 깊이야 더 진할 수 있어도 그 감정과 그로 인한 결과의 종류는 바뀌지 않는다. 신참 스파이더맨이 이를 주도해야 스파이더맨이라는 '역할'에 대한 존경이 완성되며, 기존의 스파이더맨 역사와 차별화되는 캐릭터 구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놀라운 깊이로 스파이더맨에 집중했고, 압도되는 시각적 연출과 분위기 조절로 장르 영화로써 엄청난 미덕을 이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