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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Apr 23. 2023

당신이 친구인 게 문제다

이니셰린의 밴시(2022)



1. 친구 혹은 사람의 조건



    같이 어울릴 만한 친구의 자질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나열하면 고전적인 진리관은 그를 속물 혹은 냉혈한 취급한다. 그러나 품고 있는 따뜻함의 대소와는 별개로, 모든 사람은 친구에게 몇몇 조건을 요구한다. 자기 계발이나 성찰을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그 조건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할 것이다. 먼저 속물적인 요소를 전부 제외하고, 내가 생각하는 친구들이 겸비했으면 하는 것들을 읊어보고자 한다.


1) 사회적 능력치의 총괄


    이는 기본적인 눈치, 관계적 문제 해결 능력들을 포함한 사회적 성숙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친구를 동등하게 대우한다. 그건 상대가 나와 동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지와는 상관없이, 일단 이 믿음을 기저에 깔고 상대를 대한다. 그리고 상대는 이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원활한 관계 유지가 가능하다.


2) 사고관


    사고관은 정치 이념이나 무슨무슨 주의 같은 분별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 언변과 이를 가능케 하는 발상력을 의미한다. 그 안에는 위트도 포함되고, 돌려서 말하는 능력도 해당될 것이다. 이게 부족한 상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지루함에 빠지게 된다. 심심함은 할 게 없는 것을 뜻하고, 지루함은 상대와 같이 보내는 시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뜻한다. 그래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모여서 할 게 없으면, 심심할 수는 있어도 지루할 일은 없다.


3) 취미


    위의 항목들은 내적인 가치들이다. 우리가 겸비하면 좋은 무기들인데, 취미는 저 둘을 기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생산적인 행위다. 경험편력의 일환이자 자아실현의 구체화인 취미가 없는 사람들은 만나서 할 수 있는 행위,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극히 적다. 또한 취미의 여부는 근황의 유무와 연결된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의 진부함은 해결해주지 않지만, 여기서 유익함 정도는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니셰린의 밴시(2022)는 세 가지 항목 중 어떠한 것도 가지지 못한 텅 빈 인간과 고무적이지만 극단적인 인간의 난투극을 다룬 영화다. 파우릭과 친하게 지내던 콜름은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이 취미인 노인이다. 콜름은 자신의 열망에 진심을 다 할수록 파우릭이라는 인간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그 한심함이 자신에게 전염되고 있음을 체감했다. 그래서 파우릭과의 결연은 그에게 있어 자기 보호에 해당한다. 이 골자는 우정에 대한 흔해빠지고 무가치한 기존의 관념을 부수면서, 인간의 능력과 노력의 관계를 재조명했다. 우리는 '의리'라는 단어를 빌미로 친구와 큰 사건 없이 소원해지는 것에 대해 야박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친구 관계는 감정으로 시작하고, 결국 감정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 문제에 대한 도의적인 시선을 거두고, 인간관계에서 느껴지는 실질적인 스트레스에 집중했다.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대와 함께하며 느껴지는 부조화의 방치는 개인의 안녕과 대적된다. 좋은 친구 이전에 좋은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을 계속 친구로 두는 것이야말로 속물적이고 매정한 것이다. 능력의 부재 자체를 도의적으로 죄라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능력의 부재는 확실한 오()이고, 치명적인 오는 악랄한 죄보다 훨씬 성가시고, 불쾌한 경우가 많다.   



2. 동물들과 손가락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상징은 동물들이다. 정확히는 가축들이고, 결론적으로 이것들은 안락함을 상징한다. 깨어있는 역할인 시오반의 가축들을 집에 들이지 말라는 말대로, 기본적으로 이 안락함은 부정적이다. 이니셰린이라는 작은 마을은 무지성주의의 온상이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상술한 친구 혹은 사람의 조건들을 대부분 함양하지 않고, 동물적이고 말초적인 관심사와 위치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축들에게 매긴 기본적인 안락함은 이니셰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없이, 개인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나태를 의미한다.


    다른 동물들도 많이 나오지만, 검은 당나귀, 파오릭의 말 그리고 콜름의 강아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겠다. 당나귀는 콜름과의 관계에 대한 성찰 없는 유지를 상징한다. 파오릭은 콜름에게 충분한 설명을 듣고, 과격한 의사 표현도 받았지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당나귀로 은유되는 그의 안락함은 고질적인 어리광에 해당한다. 파오릭은 콜름의 손가락을 잘못 먹고 질식사한 당나귀를 보내고, 대신 말을 타고 다닌다. 말은 당나귀보다 더 질이 낮은 감정을 나타낸다. 능력의 심각한 부재라는 오를 안고 있던 파오릭은 관계적, 성품적으로 몰락하면서 끝내 악으로 거듭난다. 말은 그가 이룩한 악함을 뜻한다. 이전의 파오릭이 무색무취에 무가치한 인간이었다면, 이제는 인간성을 재고할 필요가 없는, 소위 말해 사람새끼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파오릭은 더 이상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성찰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 안락함은 고정된 안주에 해당한다. 콜름의 개는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파오릭이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기 전, 콜름의 강아지는 파우릭을 끊어냈고, 그로 인해 기대되는 클롬의 생산적인 미래를 상징한다. 물론 그 강아지는 파오릭과 결연을 결심하기 전부터 키웠겠지만 말이다. 파오릭은 불을 지르기 전에, 강아지는 살려주고자 했다. 이는 클롬이 파오릭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클롬의 미래에 악영향이 될 것이라는 통찰을 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불에 타 죽지 않은 클롬과 재회했을 때, 강아지는 클롬에게 달려갔고, 클롬은 강아지를 반겼다. 이때의 강아지는 파오릭에게 완전히 지배당한 클롬의 암울한 앞날을 상징하고, 이 안락함은 인격적 죽음을 의미한다. 클롬이 신부에게 고백한 좌절이 실현된 것이다. 클롬이 이 강아지를 반긴 것은 영화적인 장치로, 클롬이 파오릭을 앞으로도 끊어내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파오릭의 내면에 해당하는 그의 집에 가축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온 것은 가망 없는 현상 유지를 의미한다.


    클롬은 피해자로 연출되었지만, 완벽히 인정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클롬의 극단성이 대표적인 근거이고, 그 극단성은 자기 파멸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에 대한 열망을 가진 클롬이 굳이 손가락을 잘라 파오릭에게 던진다는 것은 파오릭과의 관계가 자신의 미래에 큰 해가 된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왼쪽 손가락은 필수불가결하다. 미래에 대한 일갈로 행한 일이 현재의 충실함을 앗아간다는 뜻이다. 아일랜드 음악을 잘 알지는 못해서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바이올린 실력도 그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열변을 토하지만 정작 모차르트를 잘 모르는 것도 그렇고, 클롬은 비브라토를 할 줄 모른다. 왼쪽 손가락을 떨어 소리를 진동시키는 것인데, 클롬은 실력이 부족해 미세하게 한 번 겨우 흔드는 것에 그친다. 그리고 음이 제일 높은 줄에서 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다. 그 현은 소리를 잘 내기 어려운 거지, 소리를 내는 것 자체는 위치상 제일 쉽다. 바이올린 연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미 현 연주를 하지 않고,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잃은 후 합주에서 활도 없이 바이올린을 흔들어 연주에 몰입한 척하는 모습을 봤을 때, 감독은 클롬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파오릭 보단 능력이 출중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캐릭터를 구축했다고 추측된다. 이는 영화의 전체적인 선악 판단을 느슨히 하면서 메시지를 강화한 시도다.



3. 이니셰린의 두 죽음



    밴시는 아일랜드 민화에 나오는, 가족의 죽음을 울음으로 예고하는 귀신이다. 영화 속 노파가 이르기를 곧 두 개의 죽음이 발생한다고 했다. 영화에서 실제로 죽은 대상은 파오릭의 당나귀와 도미닉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노파가 말한 두 죽음은 파오릭의 인간성과 클롬의 미래다. 더 이상 인간의 수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파오릭과 평안한 미래가 산산이 부서진 클롬. 둘은 이니셰린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투닥대며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결국 클롬이 작곡한 이니셰린의 밴시는 예지몽에 가까운 진혼곡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동시에 예술의 조예를 넓히다 보면 문득 드는 감정이 있다. 여러 이유로 대화가 즐겁지 않지만 그래도 친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깝다는 것. 나는 그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자연스레 멀어지는 관계와 같지는 않지만, 그런 식으로 멀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해당 관념으로 도출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이야기를 꾸렸고,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으며, 동시에 타성에 젖어 시간을 괄시하는 속 편한 이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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