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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Apr 27. 2023

읽을 줄도 모르는 처방전

절멸의 천사(1962)



    루이스 부뉴엘은 스페인, 멕시코의 영화감독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과 초현실주의 사조를 이끌며 라틴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거장이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감독 작품이 세 편이나 상영을 하고 나도 그중 한 편은 티켓팅에 성공했다. 절멸의 천사(1962)는 그의 중기와 후기 사이에서 제작된 영화다. 어느 부르주아가 20명의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기로 했는데, 당일 저녁 모종의 이유로 하인들이 대거 저택을 나간다. 파티는 계속 진행되지만 자정을 넘겨도 저택을 나서는 손님이 없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저택 주인과 집사들을 포함한 모두가 자발적으로 접대실을 나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상황에서 부르주아들의 약하고 추한 모습들을 다룬 이야기다.



1. 블랙 코미디란?



    코미디는 인간의 긍정적인 부분을 통해 유쾌함을 자아내고, 블랙 코미디는 인간의 부정적인 부분을 통해 유쾌함을 자아낸다. 이 긍정적인 부분에 포함되는 슬픔이나 좌절은 등장인물 당사자들은 부정적으로 느끼지만, 그걸 관조하는 관객들은 거기서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해학으로 마무리되는 서사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질 낮은 코미디 영화는 본인들이 앞다퉈 등장인물을 무시하며 자학에 가까운 개그를 선보이고, 관객들은 영화의 개그 코드와 별개로 유쾌함을 느끼지 못한다. 블랙 코미디는 인간의 추함을 재료로 응당 요구되는 인간의 가치를 되새긴다. 불쾌한 모습들로 유쾌함을 설계해야 하기 때문에 블랙 코미디는 그 철학이 얄팍하면 관객을 자극시키지 못하고, 뜻하지 않은 위치적 오해들을 조장할 수 있다. 구조만 제대로 잡는다면 일반 코미디보다 서사의 완결성이 두드러지지 않아도 특유의 재치로 인정받는다.



2. 이분법을 벗어난 계층론



    이 영화는 계층에 대해 논하지만 대비를 사용하지 않았다. 보통 계층론에 대한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를 한 자리에 놓고, 그들의 관계성을 변형, 재정립하지만 절멸의 천사는 둘의 공간을 확연히 나눠 섞이지 않도록 했다. 사건이 발생한 저택 안에 있는 부르주아들은 나가지 못하고, 밖에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은 들어가지 못하며, 묘사 상 두 공간의 시간마저 다른 속도로 흐른다. 덕분에 초점은 부르주아들 자체에 집중됐고, 그들의 추한 감정선에 낱낱이 파고들 수 있었다.


    극을 진행시키는 가장 중요한 쟁점은 비밀의 부재다. 부르주아들은 첫날밤 이후로 반복되는 수면 시간을 협작 혹은 염문의 장으로 사용한다. 다른 사람들이 잠에 들었으니 은밀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이런 모든 장면마다 누가 뒤에서 몰래 듣고 있거나, 도중에 이야기에 낀다. 이 설정 덕분에 자원 없이 갇힌 부르주아들의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심신 미약에 빠진 사람을 위해 써야 했던 진통제는 심심한 이들의 마약으로 소진됐고, 뒷담 때문에 감정이 상한 남자는 다른 남자가 찾고 있던 알약을 방 밖으로 던져버려 환자의 병세가 악화됐다. 결론적으로 그들 사이에 아무런 비밀이 없다는 것은 적어도 관객인 우리 입장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감출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평소에 가식적인 표정과 언행으로 서로를 대하던 그들이 턱시도 자켓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다니며, 씻지도 못하고 화분에 있는 물이나 겨우 마시는 모습들은 블랙 코미디로서 상당한 쾌감을 자아냈다.


    그들에게 두 가지 동물이 눈에 띈다. 양 몇 마리와 곰 한 마리인데, 양들은 우연히 부르주아들이 갇힌 방으로 들어와 아사하기 직전 식량이 되어주고, 곰은 부르주아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저택 마당으로 걸어가 밖에 있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발각된다. 저택으로 돌아온 하인 한 명이 길들여진 곰이라며, 곰을 쏘려던 경찰을 만류한다. 양은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을 상징하고, 곰은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긍정적인 모습은 살아남는다는 명목으로 포기했고, 부정적인 모습은 이를 곁에서 익히 보던 하인의 말마따나 길들여졌다. 익숙해져서 문제 삼지 않게 됐다. 그래서 곰은 부르주아들이 들을 수 있게 몇 번 울 뿐 그들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더이상 그들이 관리, 함양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 그들이 성직자들과 다시 교회에 갇혔을 때, 이번에는 양 떼들이 무리 지어 교회로 들어갔다. 사람 수가 늘어난 것도 있겠지만, 권력층들에 대한 딱딱하지만 매서운 시선을 곧 죽을 동물들로 비유한 것이다.



3. 수미상관을 통한 수미상관



    이 방을 탈출할 방법은 꽤 단순했다. 파티 초대 당일 자정, 손님 한 명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다른 사람들이 박수치며 간단히 평을 했는데, 이를 똑같이 재현하면 됐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점이 며칠 전에 했던 말들을 그들이 전부 기억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은 그 말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수 있었을까? 서 있는 위치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한동안 정신적, 위생적 지옥에 있었던 그들은 일반적으로 기억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저택 주인의 언급을 들으면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자정에 가까워졌음에도 손님들 중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자 저택 주인은 매너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그리고 저택을 나설 수 있는 방안은 정상적으로 제 때 저택을 나설 수 있었던 그 순간의 재현이었다. 이를 종합해 영화의 설정을 들여다보면, 부르주아들의 무의식적인 무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애초에 그들은 초대받은 입장임에도 주인인 양 마음을 먹고 있었고, 애초에 나가는 게 맞다는 매너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이다. 어느 여자의 핸드백에서 깃털과 함께 나온 닭다리 두 개는 이에 대한 부담스러운 상징이다. 이들의 주객전도는 무지가 아니다. 그냥 그들이 저버린 여러 덕목들 중 하나에 불과하고, 덮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위급 상황에서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부르주아들 중 부정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소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처녀라 불리는 여자다. 그녀는 부르주아들과 섞이지 못하고 뒤에서 여러 소리를 듣는다. 여자들은 그냥 재수 없다고 욕하고, 남자들은 그녀의 특이한 기질을 재밌는 여자라며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뭉개버린다. 그녀는 파티가 무르익기 전, 돌을 하나 던져 유리창을 깨버리는데, 이는 곧 다가올 사건을 감각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공간의 강제성은 외적인 장치지만, 이를 내적으로 해석하면, 그녀가 거부한 것은 부르주아들의 무례함이고, 하인들이 관성적으로 저택을 떠난 것은 그 무례함과 엮이기 싫었음을 내심 느꼈기 때문이다. 사건 해결의 트릭을 알아낸 것도 처녀라 불리는 여자였다.


    결말에서 그들은 해당 사건 때문에 죽은 세 명의 남녀의 장례식이 끝난 후 다시 교회에 갇혔다. 수미상관으로 사건을 정리하고, 다른 수미상관으로 아이러니를 강화했다. 이는 영화에서 조명된 부르주아들의 어두운 면이 감독의 개인적인 시선이 아니라 사회적인 진실임을 뚜렷이 표현한 것이다.

   


4. 절멸을 공지하는 천사



    이 영화의 제목은 절멸의 천사다. 하지만 이 영화 속 부르주아들은 탈출에 성공했고, 천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천사는 부르주아들이 당한 사건 자체를 의미한다. 천사는 성경에서 무언가를 전달하는 매개체 같은 존재다. 결국 영화는 부르주아들에게 그들의 추한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시 갇히는 결말로 부르주아들의 가능성을 묵살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소시민인 내 입장에서는 적당히 달아 오르는 블랙 코미디였다. 절멸은 이 알려줘도 모른다는 답답함을 의미하며, 제목 속 천사는 부르주아들의 절멸을 공지하려 내려온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부르주아들이 갇힌 저택과 나중에 갇히는 교회 모두 바깥에서 백기가 꽂힌다. 바깥에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걸어놓는 것이지만, 나는 그 깃발이 병원에서 소견서 마지막에 찍는 도장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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