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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Jun 01. 2023

시상으로 꾸미는 마감날

영원과 하루(1998)



1. 예술가의 작업



    이 영화의 골자는 늙은 예술가의 성찰이다. 시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돌보지 못한 알렉산더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자, 죽은 아내의 편지에서 시작된 단상으로 작은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알바니아 난민인 아이와 만나면서 과거를 돌이켜본다. 


    우리가 여러 작품에서 흔히 접한 예술가들의 모습은 '섞이지 못함'이다. 그들의 기질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 그들의 작업 양상이 자폐적이기 때문이다. 독방에 처박혀 원고를 꾸기는 소설가, 담배꽁초로 언덕을 만들며 한숨 쉬는 만화가, 악상에 고민하다 키보드 건반에 손찌검하는 작곡가. 그들 작업의 출처는 세상이고, 영감도 거기서 얻지만 작업의 순간 자체는 세상과 단절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고뇌하는 예술가는 가족들과 잘 지내는 경우가 드물다. 그들의 반려자는 묵묵히 예술가를 지지해 주거나, 소통의 단절로 불만을 제기한다. 자식과도 소원해져 가정사의 근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문제들이 예술가들의 약함에서 기인하는 착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과 섞일 수 없다는 특별성으로 존재하는 예술가들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불편해하는, 심하면 혐오하는 세상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니 세상에서 재료를 얻는 예술은 인간관계를 등질 수 없다. 세상살이의 핵심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칩거하는 예술가들조차 세상 속 사람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는다. 집중력이니, 자존심이니 핑계가 여럿이지만, 예술가는 예술 작업과 예술 자체를 엄격히 나눠서는 안 된다. 자기들이 영감이 안 떠오른다면서 내는 짜증을 주변 사람이 포용해 주는 건 배려지, 교양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를 강한 정신력과 성숙한 성품으로 잘 조절할 수 있겠지만,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강한 뜻을 담는 약한 그릇들이다. 예술가들이 다른 사람들과 결연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 속 알렉산더도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예술가다. 한국으로 치면 돌잔치 날, 테이블 세팅과 접객으로 분주한 와중, 알렉산더는 산등성이에 올라갔다 오겠다고 한다. 아내인 안나는 지금 만큼은 자기랑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알렉산더는 미안하다며 아랑곳하지 않고 산에 갔다 오고, 안나는 체념한 채 나중에 경치는 어땠냐고 물어본다. 이런 일들이 빈번했는지, 안나는 알렉산더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로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 발견된 편지들로 전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러닝타임 속 여러 일을 겪으며 때늦은 감정들을 체감하게 된다. 그 감정들의 이름을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영화 마지막에 조금씩 줌인되는 그의 뒷모습으로 감정의 크기만 여실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2. 시적인 순간들



    영화의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본인이 직접 시를 쓸 정도로 시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종종 낭송되는 시는 다른 영화에서 급하게 작성된 시들과 깊이를 달리한다. 앙겔로풀로스는 자신의 역량을 대사의 훌륭함으로 끝내지 않고, 시를 영상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알렉산더는 현실의 문제인 알바니아 아이의 귀환을 도와주면서, 연상되는 과거로의 몽상에 빠진다. 그 수순은 비밀스러운 독백이기도 하고, 아이에게 전하는 따뜻한 구전이기도 하다. 감독은 적절한 길이의 테이크와 진중한 속도의 패닝으로 환상적인 광경을 영상에 담았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 짓는 감정선, 낯선 이들이 만나는 서사, 시와 영화의 내밀한 조화를 추구한 기획까지, 어느 방면에서 보나 탁월한 시도였다. 와중에 음악의 확실한 끊고 맺음으로 연속되는 영상 매체의 특성을 강화했다. 아이의 눈으로 시작되는 남녀의 길거리 왈츠는 알렉산더의 등장으로 음악과 함께 끊긴다. 알고 보니 알렉산더의 비서의 아들의 결혼식 행사였다. 알렉산더는 곧 죽을 자신 대신 개를 맡아줄 사람이 없어 굳이 그 상황에 비서에게 개를 부탁한다. 알렉산더가 등을 보이자 바로 음악과 함께 신랑신부의 춤은 속행된다. 


    여정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와 바다를 바라보는 알렉산더의 몽상도 비슷하다. 몽상의 배경은 문제의 돌잔치 날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안나다. 다가오는 알렉산더를 발견한 안나는 알렉산더를 부르며 그에게 다가가고, 반주는 영상 속 반주자들의 중단과 함께 끊어진다. 알렉산더는 대화를 하다 말고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몽상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메인 ost가 흐르며 그의 뒷모습을 비춘다. 이렇듯 영화 속 bgm은 몽상과 현실의 경계 역할을 하며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아이와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비를 피하고자 세 명의 남녀가 버스에 탄다. 그들은 각각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를 케이스도 없이 들고 있었고, 버스에 자리하자마자 연주를 시작한다. 그러다 음악당이라는 버스기사의 말에 따라 연주는 중단되고, 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버스비도 안 내고 내린다. 이 장면은 알렉산더의 과거와는 무관한 단상에 불과하지만, 연주를 즐겁게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을 함께 담아 아이와 알렉산더의 교감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헤어져야 하지만 친해진 그들의 이야기를 비를 맞으면 안 되는 악기와 문제없는 연주를 연결지은, 시적인 작법이기도 하다.         



3. 영원과 하루



    작품의 제목 영원과 하루는 크게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죽기 전 마지막 하루에서 깨달을 바를 깨달은 알렉산더의 구원을 의미한다. 이 구원은 알렉산더의 영혼의 안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인간 실존의 의미에서 영원을 표방한다. 두 번째로, 영원을 상술한 예술의 거시성, 하루를 예술에서 피할 수 없는 삶 속 사람들로 빗댈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영원과 하루'는 대립하는 예술가의 소명과 인간의 삶에 대한 영화의 통찰력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알바니아 아이를 영원, 알렉산더를 하루로 해석할 수 있다. 알렉산더는 이제 곧 죽을, 글자 그대로 하루살이이고, 아이는 미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는 남자가 아이의 창창한 미래를 지켜주는 이야기 골자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들은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그리스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요구되며,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이 나름 명확한 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도 그리스와 알바니아의 관계를 이해해야 영화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이분법에 국한되지 않는, 미련 넘치는 마감자의 감정선은 이해가 쉬웠고, 유려한 미장센을 통한 환상적인 장면들은 영화 본연의 즐거움을 충분히 충족시켜 줬다. 영화의 잔잔한 바이브는 지루함이 아니라, 시집 한 권을 읽기에 안성맞춤인 디자인 좋고 조용한 카페의 공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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