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게 무서웠던 남자
이레셔널 맨(2015)
1. 운을 논하기 위하여
이레셔널 맨(2015)은 우디 앨런의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 고뇌하는 한 지식인의 우스꽝스러운 말로를 다뤘다. 이 작품의 실존주의의 근간은 운이다. 즉 인생의 우연성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다뤘는데, 나는 우디 앨런이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10년 전에 매치 포인트(2005)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와는 별개로, 매치 포인트를 통해 어떤 영역을 밝혔고, 그곳에서 발견된 극적인 이야기가 이레셔널 맨에 담겼기 때문이다.
매치 포인트는 운이 없어 실패한 테니스 선수 크리스가 친구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여자가 임신하자 죽여버린다는 내용이다. 이 살인 과정에서 운 좋게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통념적으로 운은 따분한 대상으로 치부된다. 인간의 아름다운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데, 통제도 안 되고 요행에 가까운 운은 나태한 자들의 어리광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운은 개인사에서 노력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운의 반대인 불운과 아울러져 거대한 우연성을 이룬다. 그러니 운은 노력에 반대되는 태평한 게 아니라 충분히 겁먹을 만한 불가항력이다. 우디 앨런은 매치 포인트라는 촌극을 통해 이 사실을 공공연히 강설했다.
이레셔널 맨은 여러 사건으로 상처를 받고 삶의 의지를 잃은 철학과 교수 에이브가 자신의 학생 질과 사랑에 빠지며 시작된다. 본디 이 일로도 충분히 삶의 방향성을 좋게 잡을 수도 있었지만, 에이브는 한 오지랖을 통해 자기가 예전에 포기했던 경험론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며 일이 틀어지게 된다. 에이브는 카페에서 남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죽어도 싸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발견하고, 실제로 계획 하에 죽여버리며 이를 삶의 활력으로 삼는다. 그러나 에이브의 살인이 질에게 들통나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용의자가 생기자 질은 에이브에게 자수할 것을 강요한다. 감옥에서 썩히기 싫었던 에이브는 질을 살해하려다 발을 헛디뎌 죽게 된다.
크리스와 에이브의 차이점은 언어적 능력에서 기인한다. 운동선수였던 크리스와 달리 예술적, 지적으로 출중한 에이브는 삶의 우연성에 대해 더 고차원적인 고뇌를 하게 된다. 크리스가 단순히 말초적인 욕망을 탐했다면, 에이브는 자기 자신도 납득 가능한 안영을 바랐다. 즉 매치 포인트에서 구축된 주제를 이레셔널 맨에서 훨씬 설득력 있고 명제적으로 다룬 것이다. 이레셔널 맨은 실존주의 속 선택, 정의와 악의 구분, 생각과 실천의 근본적인 차이 등 뇌를 차갑게 해주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똑같이 치정 요소가 있었고, 감정적이었지만 매치 포인트보다는 차분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멍청하고 악랄한 주인공의 생존보다는 측은하지만 한심한 주인공의 사망이 더 와닿았던 셈이다.
2. 에이브는 어떤 사람인가
이 영화는 에이브의 몰락을 통해 질의 성장으로 귀결되고, 그런 에이브도 사실 그렇게 특별한 캐릭터는 아니다. 능력이 뛰어나서 세상을 도와주고 싶었고, 힘에 부쳐서 좌절하다 자기 합리화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지는, 전형적으로 순수한 캐릭터다. 이 영화의 핵심도 에이브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에이브의 서사라고 생각하는데, 에이브의 감정에 몰입해서 영화를 감상하다 보니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생겼다.
에이브의 가장 첫 번째 운은 지적 능력일 것이다. 능력이란 게 모두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지만 에이브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심란하고 좌절한 와중에도 명성이 자자했다. 자기 비하를 하며 끄적인 논문과 책은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의 존경심을 샀고, 에이브의 염세로 포장된 때 묻은 낭만주의는 여러 여자들을 홀려 끊임없는 염문을 낳다. 이런 에이브가 멋있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중요한 점은 에이브를 세상 사람들이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이브처럼 정신적으로 크게 아픈 경우, 대게 관계는 고립되기 마련이고, 결국 칩거하게 된다. 이 사람이 조용한 자살로 삶을 갈무리하거나, 끔찍한 산통을 이겨내고 다시 안정의 궤도에 돌아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에이브는 질의 대사처럼 곧 죽을 것 같은 티가 팍팍 났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삶의 좌절에 대한 필수적인 고민을 혼자 정리하지 못했고, 경계적인 상태에서 이상한 욕망에 빠져 영화 결말 같은 사달이 난 것이다. 에이브의 가장 이르고, 깔끔한 운인 능력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 점은 꽤 신선한 아이러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언급된 에이브가 받은 상처들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받는 상처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원인인 것과 원인이 명확한 것과 원인을 찾으면 안 되는 것. 첫 번째는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경우이고, 두 번째는 타인이나 제도 등 내가 아닌 부조리로 발생한 일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구분이 모호한데, 결국 내가 상처를 받게 된 정황에 집중하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든 행동을 하든 빨리 지나가는 게 상책인 것들을 말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상처는 그 구별이 사람과 상황마다 다르고, 이를 잘 정리하지 못하면 내가 원인이 아닌 상처들을 자기 탓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 에이브는 가장 친했던 종군기자가 폭발에 휩쓸려 죽었고, 의로운 일을 하러 타국에서 고군분투하는 사이에 아내가 다른 친구랑 바람이 났다. 이런 일들은 굳이 결정하자면 원인을 찾으면 안 되는 상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워낙 큰 일들이기도 하고, 친구의 죽음은 탓할 대상이 너무 많고 크며, 아내의 외도는 탓할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근데 에이브는 자기 인생의 끔찍한 일부분을 인생 전체라고 생각해 버렸고, 극단적인 생각들로 일생을 보내게 됐다.
에이브의 가장 약해진 모습은 그의 감정론에서 찾을 수 있다. 에이브는 대사로 여러 번 자기 비하를 곁들여 언어와 철학, 예술과 지식의 무가치함을 강조한다.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지식인인 자신의 삶을 무시하며 직관을 중시했다. 에이브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론자였지만, 내레이션으로 열고 닫히는 그의 신념은 확연히 다르다. 스카치에 의존하는 위태로운 지식인 에이브의 감정론은 쓰디쓴 차악이었다. 죽을 것 같지만 죽을 수는 없으니 일단 살고 보자는 마인드로, 언어와 사유에 염증을 느끼지만 이를 포기할 수는 없는, 영양실조에 걸린 수도사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후반부 에이브는 찰나의 감정에 휘둘려 지금껏 지켜온 언어를 버리는, 감정론자를 빙자한 감정적인 사람에 불과했다. 이성에 지쳤다가 이성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 그래서 제목도 이레셔널 맨인 것이다. 센티맨털 맨이 아니라.
3. 우리도 박수를 쳐야 할까?
이 영화는 상술했다시피 내레이션으로 열리고 닫힌다. 이 내레이션은 에이브와 질의 독백이고, 경쾌한 피아노 소리 위에서 읊조려진다. 그런데, 에이브가 택시를 타고 영화 배경인 대학교로 가는 장면과 질이 충격을 이겨내고 해변에서 산책을 하는 장면 모두 난데없는 박수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박수 소리는 우디 앨런의 조소다. 무엇에 관한 조소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우디 앨런은 자신이 느끼고 본 시야와 그에 따른 나름의 입장정리를 이레셔널 맨에 담았다. 삽입된 박수 소리는 자신이 관객을 주시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밝힌 셈이다. 나는 이 영화를 완성한 우디 앨런과 이 영화를 보고 단순한 통쾌함에 매몰되지 않은 관객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매치 포인트를 보고 단순한 불쾌함에 빠진 사람들에게 기분 나빴던 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