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을 한 신부님(2019)은 얀 코마샤 감독의 폴란드 영화다. 전과가 있어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청소년 다니엘은 소년원에서 가석방을 받고 토마시 신부가 추천해 준 목공소로 향한다. 소년원에서도 했던 단순 작업에 진저리가 난 다니엘은 출근하지 않고 목공소 아래 마을에 있는 성당으로 향한다. 거기서 가석방 직전에 훔쳐온 사제복으로 신부 행세를 하게 되는 이야기다. 따라서 기본적인 이야기 흐름은 인간의 양면성을 종교의 순수함과 함께 논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사실이지만 나는 이 영화가 미련한 인간이 운명의 양면성에 도전하는 이야기로 보였다.
1. 다니엘과 천주교
다니엘이 천주교에 귀의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년원에 들어와 보니 자신의 미래가 어린 날의 실수로 망가져버렸다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교도관들은 인격 모독과 함께 이를 계속 학습시켰고, 토마시 신부도 따뜻하긴 했지만 결국 말의 내용물은 같았다. 소년원 내에서 폭력은 상시로 발생했고, 자신을 증오하는 동급생을 같은 소년원에서 만나게 되자 다니엘은 성경을 읊조리며 구원을 바랐다.
다니엘은 전과가 있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토마시 신부의 추천으로 시골 목공소에 일자리를 얻는다. 다니엘은 막 도착해 한창 작업 중인 목공소 사람들을 보며 발길을 돌렸다. 소년원에서 작업했던 목공일과 전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공소는 취급도, 속한 사람들도 모두 미래를 잃은 전과자들의 세상이었다. 실제로 시간이 조금 흘러 같은 소년원 출신인 핀스헤르가 그 목공소에 취직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다니엘의 언행과 행색만 보고도 목공소로 가야 할 전과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영화 속에서 목공소는 상술한 대로 사회에 있든 사회 바깥에 있든 사회에 낄 수 없는 세상을 표방하지만 동시에 그 논리를 각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 오프닝은 소년원의 교도관이 톱질에 대한 노하우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직각으로, 날을 끝까지 써서 절단한다는 표현은 이미 답 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전과자들을 상기한다. 부과된 처벌을 마쳐도 끝내 변하지 않는 사회와 정의의 딱딱한 시선을 유추할 수 있다.
다니엘은 도망치듯 미사가 끝난 성당으로 가 엘리자를 만나고, 각종 거짓말과 흘려 넘김으로 잠깐 동안 주임 신부의 대타를 뛰게 된다.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신이 난 다니엘은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마치 다니엘의 과거와 본질을 다 아는 듯이,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신도들은 준비가 끝났으니 들어오라는 다니엘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다니엘 역시 신부 복을 입은 그대로 편의점에서 독한 담배를 사갔고, 사망자들 사진이 붙은 게시판 앞에서 유족들이 기도하는 모습도 모른 체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점차 설교와 기도, 축복에 진지해지며 맡은 소임을 다하려 노력했고, 마을사람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다니엘에게 천주교는 자신의 과거를 외면하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긍정할 수 있는 방법론이 된다. 점점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깊게 고민하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도 확인하게 된다. 그 마을에서 최근에 자동차 추돌 사고로 7명이 죽었는데, 한 차에는 젊은 남녀 6명, 다른 차에는 평소 평판이 안 좋은 아저씨가 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저씨가 음주 운전을 해서 자기 자식들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아저씨의 아내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평소에 남편을 들들 볶은 마녀로 취급했다. 지금은 쉬고 있는 주임신부와 마을 시장은 이 사고를 흐지부지 넘기려 했고, 다니엘은 이에 강하게 반기를 들며 이곳저곳 들쑤시기 시작한다.
그러다 다니엘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같은 소년원 출신인 핀스헤르가 그 마을 목공소로 오게 되며 마주치게 된 것이다. 핀스헤르는 거금을 내놓지 않으면 다니엘의 거짓 신부 행세를 다 밝히겠다며 협박했고, 자동차 추돌 사고는 사실 젊은 남녀 6명이 마약과 술에 절어 운전한 결과였다. 현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 엘리자 조차 유족인 자기 오빠의 명예 때문에 진실을 밝히지 않았고, 다른 유족들과의 갈등은 짙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다니엘은 각종 반대를 무릅쓰고, 사고로 죽은 아저씨의 늦은 장례를 치른 후 송별 미사를 진행하게 된다. 그때 핀스헤르의 고자질로 토마시 신부가 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상황을 확인한 토마시는 본인이 송별 미사를 대신 치르겠다고 한다. 마지막 미사가 좌절된 다니엘은 사람들이 모두 모인 성당 한가운데에서 사제복을 벗고 문신 있는 자기 맨몸을 보여주며 성당을 나갔다.
이 장면은 진실이 가려지고, 의도해서 가리는 상황에서 자기 본모습을 보여준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실제로 가장 진실에 회피적이었던 엘리자의 어머니는 다니엘의 반나체를 보며 축복합니다라고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 장면으로 다니엘과 천주교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졌다. 이때부터 다니엘에게 천주교는 희망이었던 과거로 전락한다. 운명은 거기에 순응하는 삶과 거스르는 삶의 양면성을 가지지만, 여러 우연이 겹쳐 결국 다니엘은 자신의 본질을 이겨낼 수 없었고, 영원한 출신지인 소년원으로 환송된다. 거기서 식사 전에 신부가 기도를 하는데, 다니엘만 일어서서 성호를 긋지 않고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결국 다니엘의 운명론적인 저항은 완전히 좌절되었고, 이후 소년원에서 다시 한번 살인을 저지르게 되며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결론적으로 천주교를 향한 다니엘의 감정선은 순서대로 구원, 실존 그리고 패배의 서사를 보여줬다.
2. 진실일 필요가 있는가?
이 영화가 담는 관념의 호불호는 소재 특성상 따분한 양상을 띤다.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며 비극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이런 사람들을 비판하며 정작 영화에 집중하지를 못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초반부에 명확히 명시되었다. 이런 거는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먼 북유럽 나라의 이야기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니엘이 과거의 어느 인물이든, 가상의 캐릭터든 비슷하게 취급할 것이고, 그래도 상관없다. 또한 우리는 당연히 영화 속 마을 주민도, 소년원 관계자도 아니니 우리는 고쳐 쓰는 입장이 아니다. 행색이 아름답지 않다면 그 추한 모습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다니엘의 종교에 대한 열망은 일반적으로 거짓일 것이다. 온갖 방식으로 종교를 수단화했으니 신실한 사람 입장에서 다니엘은 신성 모독적인 캐릭터다. 기독교에서 출타한 나도 인정한다, 다니엘의 신심은 진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직 빨간 줄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인데, 혹시 빨간 줄이 생기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상상하곤 한다. 이 상상의 결론은 다양함이었다. 죄를 지었으니 다른 선으로 풀지, 사회의 낙인 때문에 일찌감치 번듯한 직업을 포기하고 합법적인 프리랜서가 될지. 다시 죄를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결국 가능성은 열려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상상을 하고 다니엘의 이야기를 훑어보니 꽤 괜찮은 찰나라고 느꼈다. 나락으로 빠진 다니엘의 결말과는 별개로 다니엘이 그 마을의 묵은 감정들을 해결한 건 사실이다. 비록 젊은 남녀 6명에게 가해자라는 판결은 내리지 못했지만, 유족들은 다니엘 덕분에 증오와 비애를 이겨내는 데 성공했다. 다니엘이 소년원에서 사람을 패는 장면과 엘리자의 어머니와 죽은 아저씨의 아내가 성당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은 둔탁한 타격음과 신부의 설교를 매개로 교차됐다. 진실을 은폐한 엘리자는 결국 마을을 떠나게 되었지만, 종합적으로 다니엘은 마을을 좋은 쪽으로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나는 이 양상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마스터(2012)가 떠올랐다. 전쟁 후유증으로 자아를 잃은 프레디 퀠은 사이비 집단의 리더인 렝게스터를 만나 구원을 얻었다. 영화는 렝게스터와 일행들이 이상하다고 명확히 구분했다. 작중 사이비 단체의 파티가 무르익는데, 남성들은 깔끔하게 양복을 빼입었지만, 여성들은 나체로 춤을 췄다. 또한 렝게스터가 자아를 찾는 방법이라며 프레디에게 강요하는 프로세스도 확실히 학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프레디와 렝게스터는 서로를 진심으로 위했고, 결과적으로 프레디는 자아를 찾고 불안을 가라앉히는 데에 성공했다. 프레디에게 렝게스터와 그가 이끄는 단체가 올바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 지친 자신을 달래주고, 함께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다니엘이 신부로 잠깐 활동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준 것과 자신이 신부 행세를 하며 이룬 자기만족들도 모두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아니었지만 진실보다 더 간절한 것이었다.
3. 비뚤어진 건가, 비뚤어서 보는 건가
문신은 낙인을 의미한다. 다니엘은 목공소를 처음 갔을 때 삼촌뻘인 일꾼들의 문신을 보며 기겁을 했고, 본인은 목처럼 보이는 곳에 문신이 없어 신부복으로 말끔히 가릴 수 있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거울을 보며 옷을 갈아입을 때만 자신의 낙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말부에 사람들 앞에서 보인 자신의 반나체는 더 이상 낙인을 가릴 수 없게 된 다니엘의 상황을 감각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건 진실이었고, 동시에 사회 속에서 열심히 살아갈 다니엘의 죽음을 뜻했다.
이 영화는 사람을 머리로 찍어 패느라 피로 흥건한 다니엘이 정면을 보며 도망치는 모습으로 끝났다. 이 이미지는 신부 행세에 익숙해진 다니엘이 설교 중 감정이 북받쳐올라 성수를 자기 얼굴에 흩뿌리는 모습과 대비된다. 관점에 따라서는 투명한 성수와 찐득한 피를 같은 색으로 보기도 할 것 같다. 액체가 달라도 맞은 얼굴이 같으니 결국 같은 거 아니냐며 말이다. 나는 그럼에도 분명 두 얼굴은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글러 먹은 인간일지라도, 그 인간의 족적 전부를 같은 색으로 칠할 수는 없다. 물론 다니엘은 신부 행세를 하며 진심으로 즐거웠지만 버릇을 고치지는 못했다. 토마시 신부에게 걸려 당장 소년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짐을 싸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토마시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사이 다니엘은 창문으로 도망쳤다. 성당에서 신부 복장을 갈아입다 토마시에게 걸렸는데, 화가 난 토마시는 다니엘을 때렸고, 다니엘은 창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반사적으로 토마시에게 주먹을 날렸다.
영화는 다니엘을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거의 모든 컷이 수직, 수평, 중앙정렬이 맞지 않는다. 발견하면 불편할 정도로 애매하게 어긋나 있다. 이는 감독이 영화 주인공인 다니엘과 영화가 담고 있는 관념들을 관객이 속 편하게 결정짓지 말라는 간곡한 의도다. 영화 마지막에, 카메라는 도망치는 다니엘을 잡는 데 어려워한다. 마구 흔들린다. 이는 다니엘을 화면에 담을 때 영상의 기본적인 규칙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짓지 않는 모습이다. 또한 다니엘은 거울을 볼 때만이 아니라 화면과 눈싸움을 하며 자신의 얼룩진 모습을 직시했다. 이 영화의 비뚤어짐은 비뚤어진 인간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비뚤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