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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Jan 16. 2024

어른은 웃으면서 침을 뱉는다

소설가의 영화(2022)



1. 따뜻한 이야기?



    소설가의 영화(2022)는 2022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밝은 흑백으로 연출됐고, 이야기 매체다운 극적인 서사 없이 담백한 우연의 연속으로 구성됐다.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따뜻함에 집중한다. 굳이 자극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큰 일 일어나지 않는 우리네 삶의 진실된 모습으로 영화 작법을 논한 가슴 뭉클해지는 이야기로 말이다.

    나는 이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첫 작품이었다. 영화 내용이든 감독 개인의 사생활이든, 사전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러움을 많이 품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더러움을 음미하고자 인물들의 포근한 상황을 접하면서도 엄습할 어두움을 시종일관 경계했다. 결론적으로 그런 영화가 아니었고, 홍상수 감독의 다른 필모그래피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작풍을 논할 수는 없다. 이하의 연유로 이 영화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게 됐고, 이를 최대한 내재적으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역시 모퉁이가 편하다.



2. 어른의 카리스마



    이 영화의 흐름은 상당히 단조롭다. 작가인 준희가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다, 또 누군가를 만나 다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다 뜻이 맞는 여배우 길수와 함께 단편영화를 만들게 된다. 따라서 영화의 호흡은 굉장히 길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막역한 사이도 아니어서 별 의미 없는 안부 묻기가 계속되고, 피로한 예의 차리기로 관객들은 괜히 눈치를 보게 된다.

    

    준희는 예전에 알던 영화감독과 그의 아내를 우연히 만나 그들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얘기를 연신 듣는다. 카리스마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토스처럼 청중을 휘어잡는 발화자의 힘일까? 적어도 이 영화에서 내가 느낀 카리스마는 관념적인 이론 같은 게 아니라 굉장히 실제적인 기싸움 같은 것이었다.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는 반가움보다 더 많은 역린이 숨어있다. 준희가 처음 찾아간 작가 후배와는 후배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끝까지 어물쩍 넘겼고, 영화감독에게 과거에 자기 작품을 영화화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감독은 투자자의 선택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고, 준희는 돈만 밝히는 감독의 배신이었다고 생각한다. 감독과 산책을 하다 지금은 쉬고 있는 여배우 길수를 만나는데, 감독은 재능이 아깝다며 왜 연기를 그만뒀냐고 아쉬워하지만, 준희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결정하는 거라고 오지랖 떨지 말라고 정색했다. 길수가 아는 언니가 영화 초반에 만났던 작가후배였기 때문에 우연히 같이 술을 먹게 됐는데, 거기서도 준희는 예전에 알던 시인과 만나게 되고, 길수와 찍기로 한 영화에 대해 시인이 몇 마디 거들려다가 또 정색을 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준희는 오랜만에 보는 사람, 혹은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하며 여러 주장을 강설하고, 좀 과했다 싶으면 바로 사과를 하며 예의를 차린다. 상대도 아니라고 말하며 예의를 차리지만, 이심전심이라고, 서로의 불협화음은 놀랍지 않게 들통이 난다. 나이가 어리다면 별것도 아닌 일로 말싸움을 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울거나 소리치거나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어른은 그럴 수가 없다. 당사자들이 원해서 그러는지, 사회적으로 눈치를 보는 건지, 어른들은 기분이 나빠도 나쁜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흔히 말해 얼굴에 철판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까냐가 어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기본적인 덕목인 것이다.


    이게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느낀 어른들의 카리스마다. 서로 웃긴 사람 안 되면서 얼마나 위계적, 감정적인 우위를 점할 것인가. 일반적인 평가로 영화 속 불편한 대화들은 별로 극적이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현실적인 대화의 모습이기에 리얼리즘으로 귀결된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그 대화들의 존재 자체만을 소중히 하며 연결을 끊고 싶지 않았다. 준희는 작가고,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예술을 하기 때문에 그녀의 역린은 단순히 누가 누가 더 잘 살고 있었나에 그치지 않았다. 예술에 상하가 있는가, 예술을 계속하는 것은 선택인가 재능의 통보인가 같은 민감한 감정선들이 대화 기저에 깔려있고,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깊게 터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준희와 등장인물들은 단 한 개의 작품도 특정하지 않고 주변부에 가까운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한다. 물론 여배우 길수와는 그랬기 때문에 깊은 감정 교류가 오갈 수 있었지만, 이 또한 께름칙한 부분이 있다.  



3. 컬러풀한 배신



    준희는 길수와 어떤 단편영화를 찍고 싶은지 단 둘이 이야기한다. 캐릭터들이 감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들끼리 모든 게 편하고 모든 게 진짜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배우는 오늘 막 만나 반가웠던 길수와 그녀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이어야 하고, 만드는 사람도 나여야 한다. 이 내용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여러 어른들의 대화와는 대비된다. 서로 귀찮아서 상대의 감정은 고사하고 자기 감정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고, 모든 게 불편함에 가깝고 모든 게 가식이니까. 준희가 영화 내내 보여줬던 자신의 모습과 정반대인 영화를 찍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이는 길수 입장에서 굉장히 소중한 일이고, 대화 초반에는 남편과 상의해 보고 결정한다 했지만, 술이 들어가자 무조건 찍어야 한다며 호감을 표했다. 그렇게 어찌저찌 영화가 완성되어 작은 독립영화관에서 상영하게 되었다. 길수는 상영관으로 들어가고, 촬영을 도맡았던 길수의 조카와 준희는 영화를 보지 않고 밖에 나가있는다고 한다. 길수가 혼자 영화를 보는 동안 준희는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조카는 친구인 영화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영화가 끝나 길수가 밖에 나오지만 벤치엔 아무도 없었고, 조카의 친구가 그들은 옥상에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권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여기서 내가 드는 의문은 과연 준희가 길수를 기다렸는가이다. 모든 즉흥적인 일은 항상 양가감정을 끌어오는 법이다.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별개로, 괜히 했나 하는 후회가 조금씩 얼굴을 들이민다. 이 단편영화 제작도 그랬으면 어땠을까? 막상 시작해 보니 할 일이 더럽게 많고, 결과물도 시원찮으면 어땠을까? 준희 입장에서 여배우인 길수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탈의 의무는 끝난 거 아닐까? 그래서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자기 갈 길 갈수도 있지 않을까? 길수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분명 이 가능성을 파악했을 것이다. 길수도 영락없는 어른이니까. 영화 중 유일한 컬러는 둘이 제작한 단편 영화의 일부분이다. 길수가 작중 어머니라고 추정되는 인물과 공원을 산책하며 색이 예쁜 꽃과 나뭇잎들을 모아 입을 가리며 웃는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이는 이 영화가 갖는 진실된 아름다움의 정수겠지만, 상술한 해석에 의하면 준희의 배신을 더욱 어이없게 만드는 장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길수의 짜증을 강화하는 기억일 수 있지 않을까? 막말로 아무리 영화 제작을 하면서 수백 번 봤다 해도, 여배우랑 같이 한 번 더 볼 수도 있지 않았는가. 모퉁이 영화관의 주인인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어른들의 우아한 펜싱질을 봤고, 코로나가 심할 때 상시 착용했던 마스크처럼 영화 자체가 우리들이 사회 속에서 일상적으로 덧씌우는 철가면을 은유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길수가 기쁘게 찾았던 꽃 뭉치는 컬러풀한 타액이다. 웃는 낯짝에 침을 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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