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믿음에 대한 믿음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믿고 싶어서일까, 믿을 수 있어서일까?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 자체가 믿고 싶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결국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신뢰하는 것과 현상을 인정하는 것의 차이는 그닥 유의미하지 않다. 아무리 사회현상과 자연현상을 이성적으로 구분하더라도, 결국 결정하는 건 오락가락하는 당사자의 소관이다.
영화 메기(2018)는 이하의 감정선을 필두로 캐릭터 중심의 스토리 텔링을 펼쳤다. 주연들은 각자 믿음에 대한 시련에 마주한다. 그들은 본인들의 불쾌함을 어물쩍 넘기든, 주변 사람과 불충분한 마찰을 빚든, 조금씩 쌓인 감정의 채무는 영화 마지막에 구덩이 속으로 모인다. 이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우주선을 타지 않고 우주에 나가는 방법은 엑스레이실에 취직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방사선사는 환자로 찾아온 자신의 남자친구와 꽁냥 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분위기가 달아올라 둘은 검사실에서 성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누군가 촬영 버튼을 눌러버렸고, 해괴망측한 후배위 자세의 엑스레이 사진이 남아버렸다. 그 사진의 모델들이 누군지는 다른 병원 관계자들이 알지 못했고, 현행범은 아니지만 역시 남자친구와 병원에서 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 간호사 여윤영이 그 엑스레이 사진에 담긴 게 본인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우주는 사람 심리의 총체를 의미하고, 엑스레이를 찍는 행위는 우주를 탐험하는 것으로, 본인 또는 상대의 진심을 확인하고픈 욕망을 상징한다. 구조적으로 파악했을 때, 불편한 사건에 봉착해 기대와 우려에 빠지는 작중 등장인물들은 모두 방사선사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께름칙한 감정을 느끼고, 전말을 확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더 모르게 끝나거나 본인의 망상으로 철저히 결정되어 버린다. 그로 인한 등장인물들의 선택은 극단에 치닫는다. 사표를 썼다 안 썼다 하거나, 설득을 빙자한 호소로 병실에 있는 환자들을 대피시키거나, 연인을 살인자로 확정 짓고 집에서 내쫓는다.
그들에게 결여된 능력은 유동성이었다. 엄습하는 어떤 생각들이 아무리 버거워도, 자기감정을 절제하고 상황을 견인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기 우주가 부서질까 봐 본인의 영역을 넓혔고, 이는 폭력적인 경합이었다. 이런 믿음에 대한 믿음은 등장인물들이 볼품없어서 기인한 것도 있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안고 사는 선천적인 한계라고 생각한다.
2. 수염 달린 전지자
메기는 환자 한 명이 병실에서 키우는 동물이었다. 주인공인 간호사 윤영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메기에게 말을 걸었고, 환자는 퇴원하고 윤영에게 이 물고기를 맡겼다. 메기는 가끔 수조 위로 높이 튀어 올랐는데, 그럴 때마다 서울 어딘가에 싱크홀이 생겼다. 이 싱크홀은 윤영의 남자친구 성원이 취직할 수 있게 해 줬고, 성원은 거기서 일하다 윤영이 맞춰진 커플링을 잃어버리게 된다. 일차원적으로 구덩이는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맥거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잠깐 나온 단서들로 미루어 볼 때, 구덩이는 인간이 가지는 믿음에 단호함을 부여한다.
윤영이 세탁소에서 옷을 찾았을 때 붙은 포스트잇에는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게 맞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병원 부원장도 영화 후반부에 윤영에게 본인만 알고 있으라며 같은 내용을 읊조렸다. 구덩이는 윤영이 시퀀스로 여러 번 보여준 믿음에 대한 부정적인 덩어리들을 뜻하고, 구덩이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그것들을 잘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메기는 이 영화 속에서 절대자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영화의 화자답게 모든 정보를 알고 있고, 구덩이를 만들어 등장인물들에게 행동을 재촉했다. 그래서 구덩이는 마음 약한 인간들을 재촉하는 신의 채찍질이다.
3. 왜 구덩이가 세상을 구하는가
영화 타이틀이 나올 때, 아래 영어로 세상을 구한 물고기라는 부제가 나온다. 메기가 실질적으로 한 건 구덩이를 만든 일이니, 구덩이가 세상을 구했다고 전달받을 수 있다. 구덩이가 왜 세상을 구한 걸까?
여기서 세상은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앞서 우주로 비유된 개인의 심리관과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온누리. 세상을 planet으로 적었기 때문에 나는 전자 쪽에 더 관심이 갔다. 우주가 개인의 총체라면 행성은 우주 속 일부인 당사자의 가장 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구덩이가 굳이 생겨야 했을까? 그 가장 약한, 따지고 보면 역린인 그곳을 건드리는 게 그 우주를 위한 일일까?
여기서 이 영화의 메시지가 한층 강해진다. 이 영화는 의심이라는 키워드로 모인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각종 스트레스와 걱정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헛웃음 나오는 우화로 위로한다. 하지만 유쾌함에 그치지 않고 묵직한 각성을 촉구했다. 마지막에 생긴 구덩이에 성원이 떨어지게 됐는데, 그건 윤영이 할 말 있으면 그 자리에 서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성원은 구덩이에서 윤영을 부르고, 윤영은 창백한 표정으로 구덩이 안 쪽을 응시했다. 이 결말은 두 가지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성원과의 과거는 영화가 유도하는 구덩이의 취지처럼 인정하고 넘겨야 하는 것이라는 해석과 다른 우주(성원)를 구덩이에 빠트려버렸으니 가해자인 윤영 입장에서 책임감을 갖고 신속한 결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무엇이 더 신빙성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 보기가 이 두 개 말고 더 여럿일 것이고, 그중 하나를 고르는 게 고된 일이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니 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받았다. 쉽게 말하면 다 너 잘되라고 만든 구덩이니 알아서 감당하라는 게 메기의 뜻이다. 이게 영화 속 신이 등장인물과 우리를 어루만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