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ewell to my Sunshine Days
2021년의 마지막 날을 친구 L과 함께 지지향에서 보냈다.
지난 2월쯤 갔으니까 10개월 만의 방문이었다.
L과 여행을 간 건 이번이 두 번째. 첫 번째는 여럿이 어울려 갔고, 둘이서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열 살 때 호주로 이민을 갔다가 코로나로 작년 이맘때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외국 국적이라는 게 티가 하나도 안 날 정도로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잘한다.
처음엔 혼자 계획한 여행이었는데, 기꺼이 L이 오겠다고 하여 더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지난 2월에 왔을 때는 닫혀있던 문발 살롱도 열려
밤늦게 파자마 차림으로 잠이 끝끝내 쏟아질 때까지
2021년의 마지막 책이랍시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골라 읽었다.
조식도 오픈해서 다음날 간단히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L도 나만큼 와인을 좋아해서 다음날 체크아웃 후 김포 떼루아에 들렀다. 와인을 좀 마시는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유명한 와인샵이다.
어제부터 몹시 날이 추웠다.
새삼 내가 오너 드라이브라는 사실이 어른이 다 된 것처럼 다가왔다. 차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많이 떨어 힘들었으리라.
두 번 정도 네비가 알려주는 길에서 벗어났다가 무사히 도착해 주차를 하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나 통화 잠깐만."
"그래."
엄마는 대뜸 어제 카톡으로 보낸 유튜브 영상을 봤냐고 물어보셨다. 그릭 요거트를 손쉽게 만드는 영상이었다. 그게 정말 2021년 12월 31일에 딸에게 보낼 내용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셔서 보내신 건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요즘 우유가 몸에 안 좋다고 어느 책에서 읽어서 당분간 먹지 않으려 한다는 대답을 드렸다. 엄마의 고집을 이기려면 베이컨의 우상이 가끔씩 필요하다. 엄마 생각에 좋은 건 나에게도 절대적으로 좋다고 생각하시므로.
이번에도 그 고집이 꺾어지리란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운전석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던 터라 더 이상한 얘기를 하시면 L이 뭐라고 생각할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알았다. 그래. 우유가 안 좋다는 그런 말이 있긴 하더라."
"네, 그 호르몬에 안 좋대요."
"그래. 어제 카페는 누구랑 갔니? 혼자 갔니?"
저녁에 공연을 하는 대형 카페에 있을 때 잠깐 통화를 했었지, 참. 내부를 울리는 가수의 목소리 때문에 오래 통화를 못했었다.
"아니오. 친구랑 갔어요."
"네가 친구가 있니? 친구 누구?"
1차 어택.
"네, 엄마. 요즘 동네 친구 만나는 모임 같은 데가 있어서 한 번씩 가요."
"아이구, 그래. 다행이다. 거기는 뭐, 너 같은 사람들? 아니면 결혼 안 한 사람들이 많니?"
2차 어택. 엄마의 이런 직설 화법은 40년을 들어도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아, 거의 결혼 안 한 사람들이 많아요."
이제 그만 끊고 싶어졌다. 제발.
'엄마, '저 같은' 사람이라니요.'
라고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엄마와 나는 그렇게 가깝지 않다.
"그래, 사람도 만나고 그러는 게 좋지. 집에만 있는 것보다. 그래 좋은 시간 보내렴!"
휴, 이 정도에서 끝나서 다행이었다.
"네, 엄마도 점심 챙겨 드세요."
지난번 만났을 때 브런치 계정을 알려주어 내 사정을 어느 정도 눈치챘을 텐데 L은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혼의 '이'자도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각자 가르치는 아이들 이야기로, 우리 소모임의 다른 친구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고마웠다.
엄마에게 의례히 아빠의 안부도 여쭈는 것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신나게 와인을 구경하고, 쇼핑백 하나를 가득 채운 맛있는 와인을 뒷좌석에 싣고 집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내일 두 딸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로 내 긴 스토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란성쌍둥이 딸의 존재,
같이 살며 있었던 가정 폭력,
그런데도 아직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고
내게 한동안 모든 연락을 끊고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
이제 와 생각해보니 아무리 저쪽이 육아휴직에 들어가는 찰나였고
내가 그 남자에게 비난받는 일이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지긋지긋한 일이었어도
아이들을 맡기고 나온 게 지금의 양육권 싸움에서 내가 밀리고 있는 주요한 이유인 것 같다는 내 의견,
같이 맞서 싸운 일로 소송을 건 이후 그가 경찰에 고소해
몇 년 동안 가정폭력으로 들락날락했던 아동청소년과에 피의자로 조사를 받았던 억울한 일,
그리고 그 일로 인해 학교 관리자분에게 이런 상황을 다 말해야 했던 일,
이어서 교육청에 불려 가 징계위원회에 참석했던 일,
2019년에 복직해 육아와 노동을 병행하며 너무 힘들어 딱 죽어버리고 싶었다는 얘기,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상은 슈퍼 우먼이라
자신은 생활비도 주지 않은 남자가 소장에
'아이들 반찬을 직접 만들어 주지 않아서 나쁜 엄마'라는 내용을 당당하게 쓴다는 얘기,
그리고 경찰과 법관 대부분이
같은 남자고 은근히 남자 편을 드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그래서 많이 힘들었다는 덧붙임까지.
올림픽 대로를 달리며 술김에 회포를 풀듯 풀어놓았다.
L이 기다려줘서 그랬을까? 말하는 게 부자연스럽지 않고 편안했다.
"한국 법이 문제네! 어떻게 폭력 있는 남자한테 애를 줘?"
L이 마지막에 덧붙였다.
"그래도 좋았던 기억만 생각해."
목적지에 다 와 가는데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성당의 시대'가 불어로 흘러나왔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이 노래만 해도 그래. 원래 뮤지컬 같은 거 보러 가면 꾸벅꾸벅 졸던 사람이었는데, 이건 보고 나서 그렇게 좋다고 집에 와서 계속 틀어놓고 그랬거든."
내가 좋아하는 걸 그도 함께 즐거워할 때 들던 지극한 기쁨이 추억으로 다가왔다. 작은 신혼집에 울려 퍼지던 그 시절 그 노래. 오리지널 캐스트는 다르긴 다르다며 다음엔 2층이 아니라 좋은 자리로 또 보러 가자던 약속.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나의 눈에 이내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야, 휴지 없어? 이구..."
"괜찮아, 괜찮아..."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연신 괜찮아를 외쳤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L이 말했다.
"이리 와. 안아 줄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 필요할 때 언제든지 연락해."
다정한 L이었다.
조수석이 비자 참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느라, 소송을 진행하며 싸우느라
좋았던 추억에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평생 내 곁에서 든든한 울타리가,
무슨 짓을 해도 내 편을 들어줄 단 한 사람이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그 젊었던 시절을, 그 빛나던 시간을
어떻게 잘 달래서 보내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순진한 믿음으로 가득했던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이 헤어짐을 어떻게 설득해 보낸단 말인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끔벅이는 두 눈으로 나를 걱정스레 들여다보며
“왜 그래 주희야, 무슨 일 있어?”
라고 묻고 있었다.
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를뿐더러
아직 잘할 자신도 없다.
그래서 제목은 내 빛나던 시절이여, 안녕이라고 지었지만
사실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시간만이 약일까.
마흔이 된 지금, 소송이 후반기에 접어든 지금
이제는 말해야 한다.
달래서 과거로 보내야 한다.
그때의 네가 믿었던 그 관계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과거가 되려 한다고.
너의 그 믿음은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결국 그걸 끝까지 지킬 수는 없었노라고.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그 해살해살한 얼굴이
앞으로도 한 번씩 비칠 것 같아
오늘도 내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