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언 쇼

Alien Show

by 이주희

나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였다. 힘든 일을 누구에게도 잘 터놓지 않는 성격은 어른이 된 지금도 그대로다.

그런 내게 사주팔자를 공부하며 만들어진 독서모임 내 파생 그룹 '유사과학 방'은 마치 언니 같은 존재였다.

'오늘 이전 가정 폭력 처분 건 피의자 신문 조서를 떼러 갔는데 거부당했어요.'

'소장에 이런 이런 거짓말이 적혀있어요.'

나는 나대로의 힘겨움을, 영주는 영주대로의 힘겨움을, E 언니는 언니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서로 힘이 되게 지지해주는 우리가 나는 참 자매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느낌, 편하게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충을 나누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든 소송 기간이 힘이 덜 들게 느껴졌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쉬이 가지지 못할 경험 이리라.




지난달부터 전남편이 수상했다.

같이 산 세월이 얼마인데, 척하면 척이다.

나 빼고 타로카드도 잘 보는 나머지 두 분에게 남편의 마음을 좀 뽑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예상대로 그리움, 애틋함, 그리고 미처 생각지 못한 에로스적 사랑 카드까지 나왔다.

E: 그립지만 그립고 애틋하지만 강 건너 다른 세계에 아무리 손 흔들어 봤자

나: 이미 떠난 버스..

...

나: 느낌이 좀 그렇더라고

영주: 에 그래???

나: 근데 뭐 늦었어 끝났어

...

지난주 케이크 만들기 때 확실히 느꼈다. 그의 태도가 달라진 걸.

아이들 이야기로 에둘러하긴 했지만

조금은 합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 맞네.. 맞았네 불쌍한 놈

E: 합치는 건 별로고?

여기서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이제까지 그 모든 내 고초를 다 알면서

다시 합치라니.

나: 당연하죠 언니

E: 다시 잘해준다면

나: 또 맞을 일 있어요... 아니요

E: 아

나: 정말 전 다해봤어요 고쳐지지 않아요 그리고 그 사람의 잔인성 치졸함을 다 봤기 때문에

E: 근데 맞긴 맞았어요?

맞긴 맞았냐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 반드시 과거의 남자로 만들어야 해요 지금 와서 그럴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어요

E: 누구한테 들은 게 있어서

나: 목 졸리고 차에서 강제로 끌어내고 질질 끌고 오고 뺨 때리고 어디서요 언니

E: 갠톡 ㄱㄱ

나: 누가 제 말 하나요?

영주가 이틈에 여섯 장 뽑은 카드를 종합적으로 해석해 주었다

영주: 육체적 사랑, 이성적으로 원한다 합당한 비난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받은 만큼 줘야겠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서 이혼을 생각하는 건 여전하다 양립불가라고 생각하고 자존심도 상한다

나: 아 그래도 이혼 생각이 있고 진행은 하겠구나 다행이다

E: 폭력 썼으면 두 번 안 그러라는 법 없으니 안 합치는 게 낫죠

나: 네 이것저것 다해봤는데 안됐어요 삼 년 참으며 할 거 다 해봐서 안돼요 이제 아 이혼하기 너무 힘드네요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간 아이들 문제로 속이 썩을 대로 썩은 값비싼 수업료도 너무나 아까웠다.


언니는 개인 톡을 보내왔다. 15년 전에 모임 내의 ooo과 사귄 적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먼 과거의 일이라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최근 모임에서 영구 제명을 당한 그를 김종훈이라는 사람이 감싸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 어떻게 내 이야기까지 지어냈나 보았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15년 전 나와 그 ooo이라는 남자가 사귀었는데, 내가 맞았다고 거짓말로 매도해서 그 남자가 일순간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그에게서 들으셨다 한다.


그런 일은 있지도 않았고,

나와 더 이상 연락도 하지 않는 그 김oo라는 사람이 그렇게 내 험담을 하고 다니는 걸 고맙게도 E 언니 덕분에 소상히 알게 되었다. 벌써 십오 년 전 일이고, 그는 나도 ooo도 아닌,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인데 어디서 왜 그런 말을 지어냈는지 모르겠다. 수년 전 그 사람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고 밥을 먹던 내 모습이 기억나 갑자기 더 화가 났다.

나는 남편 이전에 데이트했던 어느 남자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다.


다시 회자된 ooo은 그때만 해도 많이 어렸던 내가 바람을 펴서 삼자대면을 한 후 헤어졌다.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양다리였다. 그리고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 당시 아무런 소문도 없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처음 듣는 생소한 뒷말이었다.


나는 며칠 전 L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하듯

언니에게 처음부터 또박또박 다시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 한 자 한 자를 타이핑하며

내장이 뒤집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나: 저 맞은 거 맞아요 애들도 맞았고 ooo한텐 맞은 적 없어요 이전에 사귀던 누구한테도 없어요

가정폭력 피해 처분서를 보여주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법원과 언니는 같아져 버렸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했다.

E: 아 그러면 됐어요

나: 네 남편이 처음이에요 이런 일 네네

뭐가 되었다는 걸까? 언니의 의심이?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괜찮지 않았다. 어떻게 1년 남짓 그렇게 많은 속이야기를 다 나눠놓고는, 실컷 내 눈물 콧물 시냇물까지 다 보아놓고는 이제 와서 남편과 합치라는 둥 네가 정말 맞은 게 맞냐는 둥 말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어째서 언니가 언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김oo 씨를 집까지 바래다줬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 인간을 안 데려다줬어도 우리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나중에서야 그 사람이 요즘 정치 바이럴 마케팅으로 먹고 산다는 걸 들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허무맹랑한 공작질이 양심에 걸리지도 않고 쉬운 걸까. 하지만 나와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인, 이제는 얼굴과 이름만 아는 누군가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를 찾아가 따지고 싶지도, 얼굴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그런 사람일 테니까. 지금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언젠가 반드시 그런 일을 할 테니까. 중요한 건 내가 곁을 주고, 어쩌면 친언니처럼 따르고 있었던 E 언니였다.


이후 언니는 길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다. 애초에 김종훈이라는 사람이 ooo의 영구제명이 억울하다고 썰을 풀며 이 얘기도 곁다리로 했다는 이야기. 언니 나름대로 계속 신경이 쓰였다는 이야기. 그 사람 이전에도 봐 보니까 이상하더라는 이야기.

그리고 언니가 그렇게 부연 설명을 하려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이미 뒤집어진 내장에서 밖으로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지혈이 되지 않는 중상이었다. 경자월 마지막에, 그렇게 나는 올해치 내상을 한꺼번에 입었다.




브런치 글 100개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말했는데

심지어 그게 다 진심이고 우리는 서로 정말 아끼고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서로를 위해 기도도 많이 했는데

우리가 쌓아 올린 그 많던 시간은 허상의 거탑이었을까.

사실은 속이 텅 비어 만화 속 연기처럼 ‘펑’ 하고 터져버린 것만 같다.

누구도 내가 겪은 지옥에 대해 백 프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매일

“죽을 만큼 아파요.”

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을 만큼 아프지 않은 게 아니었는데.

애써 사람들 앞에서 헤실헤실 웃으며 티 안 내려 노력하는 내가

거기서는 그 가면을 벗어놓고 조금은 편안했는데...

내가 있던 그 지옥의 끔찍한 생김생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반복해서 설명해줘야 했을까.

언니에겐 그게 필요했을까.


역시나

남편이든 누구든

나의 속을 뒤집어 보여주는 일은

결국 이렇게밖에 돌아오지 못하는 일일까.

나는 원래

힘들고 어려워도 그냥 혼자 다 꾹 참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상처를 받았을까.

애초에 혼자였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세상이 나를 이해한다고 느낀 순간이,

사실은 동물원의 에일리언이 된 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내 토막을 올려두는 여기 이곳 브런치도 그럴지 모르겠다.


여러분은 지금 평범한 인생에서 이탈한 외계인 한 명을 나체로 구경하고 계십니다.

울고 웃고 고민하는 모습이 정말 재밌죠?


어쩌면 독자의 관음과 내 관심받기 원함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건 꼭 해피 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어쩌면 내가 아주 망가져 회복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길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나쁜 생각이 든다.

너의 가학과 나의 솔직함 사이에서 나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좋을까.

타인에게 나의 이야기는,

아니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조차 나의 이야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나 가벼운 가십처럼 피상적이라는 차갑고 쓰라린 사실 앞에서

어제에 이어 일 년 치 울음을 오늘 더 울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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