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그 난리 후 유사과학 방은 그대로 폭파되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낮에 아이들과 대구에서 시켜먹고 남은 소불고기가 하루가 지나서까지 가방에 그대로 있는 줄도 몰랐다.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서였다. 그 반찬이 담긴 비닐을 열어서 내용물이 멀쩡한지 확인할 힘도 없었기에 통째로 냉장고로 넣어버렸다.
끝도 없는 우울이 다시 나를 덮쳤다.
18층 창문 바깥의 불빛이 오랜만에 나를 불렀다.
뭔가 해야 했다.
제대로 밥부터 먹을 생각을 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늦어버려 다음날 아침에 먹을 요량으로 정말 오랜만에 쌀을 밥솥에 담가 두었다.
잠을 자다깨다 하며 어영부영 6시가 되었다. 어차피 더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나왔다. 그리고 밥솥에 불을 넣으며 김치찌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디 놀러 가면 사람들에게 늘 칭찬을 듣던 메뉴다.
그런데 시작부터 설탕을 빼먹었다.
참치액을 너무 많이 넣어
시고 짜 먹지 못할 정도의 작품이 나와버렸다.
그날 결국 아침밥을 먹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고
L이 포함된 소모임 친구들과 미리 해놓은 약속이 다음날 저녁에 있었다.
가지 말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미안했다.
함께 송계옥에서 닭 특수부위 모듬을 시켜먹고, 설빙에서 오들오들 떨어가며 딸기 빙수와 망고 빙수를 먹었다. 실없는 이야기만 잔뜩 했다.
그리고 나는 괜찮아졌다.
식당을 하는 C가 부모님께 들렀다 왔다며 사골국을 좀 주려했다. 평소라면 됐다고 했을 텐데 방학에다 전날 내가 망친 김치찌개가 생각났다. 사골을 넣은 김치찌개를 팔기도 하니, 한 번 넣어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C는 우리 넷이 모이면 자기 차로 모두를 집에 데려다준다. 가장 집이 멀어 마지막에 내리는 내가 어제는 물어보았다.
"안 힘들어?"
"힘들면 안 하지. 재밌으니까 하지."
그날 나는
방학 한 이래로 가장 음식을 많이 먹고
최근 보름 남짓 중에서
가장 편안하게 푹 잤다.
아침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
요즘 내가 누구와 어울리는지 대충 아시는 엄마는
"너무 정 주지 마라.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하신다.
내가 학생일 때부터 엄마는 내가 이상한 친구와 엮일까 봐 늘 걱정하셨다.
부산에서 1살 많은 복학생 언니가 내 짝으로 전학을 왔을 때 그 소식을 듣고 엄마가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결국 자리가 찢어졌던 일이 있다.
그 언니가 처음 왔을 때부터 그냥 잘해주고 싶었다.
나는 잘 씻지도 않고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는데
짧은 숏컷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바르고 특이한 핀을 꽂고 늘 거울을 보던 그 언니가
싫지 않았다.
내가 마음을 열면 그 언니의 과거가 어땠든 앞으로는 잘 지낼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로 인해 강제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는 그 언니에게 오히려 왕따를 당했다.
엄마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귀하게 큰 딸이 엄마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만 만났으면 하시는 엄마 마음도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엄마,
세상을 살아보니
내가 정확히 누군지 모르는 다른 사람의 환대가 있기에
죽으려다가도 다시 살아가게 되더라고.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서든 가까운 사람에게서든 ‘배신’이라는 이름의 아프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조금은 헤프게 사랑을 주는 편을 선택하는 게
그게 나란 사람의 존재 이유인 것 같아요.
그리하여 언젠가 같은 상처를 또 받는다 해도
주어진 오늘을 그저 사랑하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위로받듯
저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어요.
저도 마흔이니
이제 그만
저답게 살아갈게요. 엄마.
밥을 잘 챙겨 먹고 힘을 내어야겠다고 생각한 오늘 저녁. 어제 냉장고로 직행해두었던 김치찌개를 다시 꺼냈다. 일요일에 처박아둔 불고기는 오늘에 와서 열어보니 이미 쉬어있었다. C의 말대로 원래의 짠 국물을 조금 버리고 사골 국물을 적당히 섞은 후 파와 고춧가루를 추가했다.
회생했다.
나: C야 너 덕분에 김치찌개 살렸다 ^^ 맛저!
C: 오호 잘챙겨무라
불고기는 먹을 수 없었기에 급한 대로 김을 꺼냈다.
다른 찬도 없이 그 두 가지로 밥 한 그릇을 쓱싹 비웠다.
그렇게 나는 다시 밥을 먹고 내일을 생각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죽었던 김치찌개가 살아난 것처럼,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