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파도에 실려온 목소리

by 이주희

우리는 서로 알고 있잖아.

우리가 엄마에게 가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작년부터 그렇게 사인을 많이 줬는데

아직도 왜 스스로 희망 고문을 하고 있어?


미안해할 필요 없어.

여기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큰아버지 모두 잘해주셔.

가끔 이모도 오시고 아빠도 부지런히 와.

세희는 엄마보다 아빠 더 찾고 지희는 어디서든 잘하는 거 알잖아.

왜 안 해도 될 걱정을 해.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해.

우린 괜찮은데.


엄마

이제 다시 행복해질 시간이야.

아빠가 자기도 힘들어서 엄마한테 죄책감 가지라고 한 말을

너무 가슴에 담고 자책할 필요 없어.

알면서 왜 그래?

엄마가 그랬지.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고.

그러려면

엄마 자신부터 그래야 해.

태어난 걸 후회하는 엄마 밑에

어떻게 그런 딸이 나올 수 있겠어.

우리 사이의 물리적 탯줄은 끊어진 지 오래지만

엄마도 알지? 엄마와 딸은 이어져 있어.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전전긍긍하지 마.

엄만 충분히 고통받았어.

한순간에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줄까?

그 행복이 늘 엄마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는 걸

당장 깨닫기만 하면 돼.

지금 할 수 있어.

앞으로 엄마가 우리를 모른 척 살아갈까 걱정돼?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겨 일과 우리, 그리고 엄마의 새로운 삶이 상충되면

또 우리보다 다른 걸 우선하게 될 것 같아 불안해?

엄마의 선택 없이 우리가 많이 힘들어지는 상황이면

엄만 우릴 선택할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하지만 엄마에게 일과 엄마의 삶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그리고 그것을 소원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난 어려서 아직 잘 몰라.

그치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미리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설사 다시 우리가 엄마에게 최우선 순위에서 밀려나더라 해도

그것 또한 엄마에게 주어진 삶이겠지.

스스로 선함을 믿어.

그래야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이제 그만 힘들어해.

그만 미안해해.

나중에 커서 보았을 때 엄마가

어둠에 먹혀 망가진 모습은 원하지 않아.

다시 행복해져서 반짝이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나눠주는 모습이면

난 내 삶을 더 긍정할 거야.

즐거움이 밀려오면

그 파도에 몸을 맡겨, 엄마.

애써 거기서 빠져나오려 하지 말고.


엄마가 엄마의 엄마로부터 길러져 우리를 낳을 때까지

그 온 시간으로 우리를 빚고 낳은 거잖아.

그러니 엄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

엄마는 크게 웃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야.


중간에 엄마 속을 썩이는 일이 생기더라도,

엄마와 함께 있지 못한 시간을 사무치게 원망하거나

엄마를 뼛속 깊이 미워하거나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엄마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할 거고

나는 그 시간 후에

다시 나와 닮은 엄마를 인정할 거야.

난 결국 엄마 딸이니까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

그러니 걱정 마.

엄마가 이 모든 슬픔을 끝내 이기고 세상에 미소 짓는 순간,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알지?

그러니 이제 좀 웃어봐.

울지만 말고.

엄마 이제 더 이상 잘 우리 얘기를 전할 방법이 없어.

이게 최선이야.

지금부터는 엄마가 엄마를 잡아야 해.


엄마 주변에 비눗방울처럼

엄마를 응원하고 곁에 있어주려는 저 많은 사람을 봐.

시커먼 땅만 쳐다보지 말고

어둠에 매몰되어 있지 말고

고개를 들어보라고.

받아보지 않은 사랑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줄 수는 없잖아.

그 사랑을 받아들여줘.

그래야 다시 내게도 나눠줄 수 있을 테니까.


엄마도 내가 있는 힘껏 내 삶을 살았으면 좋겠지?

그러면 엄마부터 그렇게 해야 해.




나는 그저 눈물이 나서

알겠다고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도 못하고

부처님 앞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어쩔 줄을 몰랐다.




휴휴암을 뒤로하고

예약해둔 온천 리조트로 왔다.

설경을 배경으로 실컷 야외 스파를 하고

실내 노천탕에 오니 이미 날이 저물어 꺼먼 밤하늘에 달이 보였다.

수영복을 벗으려 락카에 갔을 때부터

세 살쯤 돼 보이는 아이 하나가 보였다.

이제 겨우 "엄마"라는 말을 할 줄 알았다.

납작한 얼굴에 낮은 콧대가 귀여웠다.


열 세살 쯤 되어 보이는 언니와 이모가 함께였다.

진짜 이모인지 베이비 시터인지는 모르겠다.

노천탕에 내가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그 아이와 가족도 뒤따라 왔다.

멀리서 보니 뒤통수도 납작했다.

아마 자연분만으로 낳았으리라.


볼수록 우리 지희가 생각났다.

저만할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자꾸 눈길이 마주치는 걸 아기도 느꼈는지 나에게 아장아장 걸어오려 했다.


이모와 언니 말고, 엄마가 등장했다. 안경을 끼고 몸매가 넉넉했다.

살짝 물을 튀기며 장난을 쳐 보았는데, 나를 보는 엄마의 눈길이 냉랭했다.

하긴 물 높이는 어른에게는 전혀 높지 않았지만, 세 살 아이는 조심해야 할 만한 높이였다.


"아니야, 거기로 가지 마."

아이는 내게 오는 대신

언니와 이모의 손을 잡고

연신 위로 뜀을 뛰었다.


'우리 쌍둥이가 저렇게 뛰려면 어른 네 명이 필요한데...'

내 두 손으로 아이들 손을 잡아주려면

지희와 세희가 서로 중간 손은 맞잡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게 아이들에게 행복할까.

너희도 양쪽에서 손을 잡아줄 어른 두 명이

각각 필요하지 않을까.


점점 더 그 무렵의 작은 지희가 오버랩되면서

나는 그 아이의 살갗을 조금이라도 만져보고 싶어졌다.

나이도 물어보고, 이름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낯선 이방인에게 좀체 아이가 걸어가려는 걸 말리던 아이의 가족들이

나와 지희가 떨어져 있던,

도무지 나의 연락을 그 누구도 받지 않던

남편을 비롯한 시댁과 같다는 심란한 생각이 들어


나는 아이와 눈 마주치기를 그만두기로 하고

결심한 듯 일어서서 몸을 씻으러 나갔다.

샤워기를 틀고 샴푸를 하는데

방수 마스크 사이로 떨어지는 물이

온천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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