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필요에 의해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 페르소나가 나는 가끔 버겁다.
독서 모임에 나갈 땐 평소보다 넓은 마음과 너그러운 미소, 조금 더 많은 말수를 장착하려고 애쓴다. 결국 다른 사람이 읽는 책과 그에 따른 생각이 궁금해서 가는 거니까. 하지만 원래의 나는 말수도 별로 없고 다른 사람의 일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페르소나’라는 개념은 심리학자 융에게서 정립되었고, 그 유래는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 벗었다 하는 가면에 있다.
어제 독서모임에 신규 회원이 두 분이나 오셔서 주재자 분이 모임 머리에 MBTI 얘기로 아이스브레이킹을 했다. 새로 오신 분들의 MBTI와 서로의 공통점, 직업과 맞는지 안 맞는지 등을 한참 이야기 나누다 나도 내 MBTI를 말할 차례가 되었다. 그간 그래도 나와 여러 번 만난 그 사회자 분이 내가 ENTJ라고 하자,
“차갑고 냉철한 지도자 형이요? 그런데 이렇게 늘 따뜻하게 웃으시는데...”
라고 하셨다.
“그거 가면이에요. 원래의 저는 좀 냉정한 구석이 있답니다. 그래서 많이 친해지면 “넌 왜 그렇게 차갑니?”라는 말을 들어요.”
전남편 얘기였다.
사람들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가면’이라는 말이 좀 셌나?
“oo님이 아직 저랑 덜 친하셔서 그래요.”
하며 얼어붙으려는 분위기를 녹이고자 내 페르소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미소’를 사용했다.
다행히 거기서 더 어색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역시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는 분들인지라 질문이 몇 개 더 이어졌다. 나는 어느 자리에 가든 거기에 꼭 맞는 가면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려고 너무 애쓰다 보니 그 가면을 오래 쓰고 있으면 힘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갔다 돌아오면 가끔은 기력이 다 빠지는 것 같다고.
그런데 찾아보니 의외로 ‘셀프’라고 하는 자아와 이 페르소나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밸런스를 잘 잡는 게 심리학적으로 가장 건강한 상태라고 한다. 페르소나를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할 때 ‘야누스’라고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도. 그래서 페르소나로서의 삶을 구별하고 그 속에 감춰진 자신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내용을 세세히 잘 알고 있진 않았만 최소한 내가 페르소나를 쓴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기에, 잘하고 있는 셈이었다.
얼마 전 그 큰 일을 겪고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1년 반 만에 상담을 다녀왔다.
그간 있었던 1년 반 치의 일을 되돌려 말해야 하는 건 그 자체로 큰 부담이었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또 폭포 같은 눈물이 흘렀지만
그 이외의 부분은 놀라우리만치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이 불행을 어느 정도 통과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잘하고 계세요.”
1년 반 전에도 뵈었던 상담 선생님께서 진심 어린 격려를 해주셨다.
상담실을 나서면서는 내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그래도 그간 제가 많이 성장했죠?”
얼굴에 웃음을 띤 채로.
모든 페르소나를 벗고 마치 나체가 된 것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이 공간, 브런치가 있어
온몸 구석구석에 난 상처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
전남편은 제게 ‘차가운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제가 그렇게 냉정하기만한 것도 아님을 이제 알아요.
드물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 적도 있었음을 실토합니다.
조금 더 성숙한 작가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글이 재미가 없어질 것 같다고요?
걱정 마세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어느 날 갑자기 중생이 부처가 될 순 없으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쉬운 타락의 길과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 사이에서 고민할 테죠.
선생님으로서, 모임 구성원으로서, 엄마로서... 모든 페르소나를 고요히 잠들게 한 후
맨얼굴 맨몸으로 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 공간을
사랑합니다.
저의 페르소나가 아니라
어둠까지 보고도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
당신이 사실 저의 테라피스트셨네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