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도

전남편에게

by 이주희

소모임에 한 언니가 최근 MBTI를 알게 되었다며 각자 MBTI를 톡방에서 물었다. 내 기본 MBTI인 ENTJ를 캡처해둔 게 기억이 나 그걸 찾으려 핸드폰 사진첩을 뒤졌다.

'기본적인 MBTI 검사가 유행한 건 벌써 삼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사진첩 속 날짜도 스크롤이 쭉쭉 올라가며 그즈음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찾아야 할 사진은 안 보이고 한 동영상이 눈에 띄었다. 2020년 6월 3일, 딸들을 찍은 동영상이었다. "아"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요구르트를 먹는 지희, 물약병을 손에 들고 꿀꺽 약을 삼키는 세희가 오후 간식 시간에 당근으로 사 온 이케아 유아 식탁에 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세 돌이 채 되기 전, 지금보다 더 앳되고 혀도 짧아 귀여운 모습이었다.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그때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동영상 옆에는 당시 한창 핸드폰으로 사진을 잘 찍던 지희가 찍어준 내 사진도 있었다. 멀리 주방에서 v를 하고 있는 모습이 찍혔다. 나는 다시금 이렇게 곁에 있던 아이들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어제 영주를 만나 이 이야기를 했다. 같이 동영상도 봤다.

"이때가 이제 세 돌? 다 되어갈 때야. 귀엽지?"

"야, 귀엽다. 별거해 나가기 3일 전이라고? 이때 무슨 일이 있어서 갑자기 집을 나간 거야?"

이상하게 영주의 질문은 거부감이 잘 안 든다.

"아, 갑자기 나간 건 아니고. 남편이 계속 폭발하고, 주말마다 같이 있으면 있다가 폭발했거든. 손 올리고. 욕하고."

"욕을 해? 뭐라고 해?"

씨발년...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남편이 하는 욕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욕 얘기는 조금 피한 후 자초지종을 이어 설명해갔다.

"내 생일 지나고 어느 주말에 손바닥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죽여버린다고 하고, 얼굴에 발을 가까이 갖다 대면서 차 버리려고 했어. 틈나면 녹음에 녹화에, "교사 생활 못하게 해 주겠다"라고 협박하고."

생각해보니 그즈음 회사라고 거짓말하고 밤늦게 술 마시다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 들킨 후에는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고, 나중에는 습관 같던 음주운전이 경찰에 적발되었는데 내게 고지서가 날아오고서야 말한 일도.

"아이들 있는 데서 그랬어..."

그냥, 그 상황을 떠올리고 묘사를 하는 데 수치심이 불쑥불쑥 올라와 한마디 한마디 말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누구든 인간이라면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당시의 나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가 키우는 개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도 애들 때문에, 정말 그 일 있고 바로 집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편 혼자 애들 못 보는 거 아니까... 그때 상담 선생님 오셔서 '이런 거만 안 하면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를 적어보래. 그래서 적은 게 이거야."

하고 당시 나와 남편이 각각 손으로 적은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나의 리스트
1. 폭행
2. 폭언
3. 거짓말
4. 말없이 행선지 안 밝히고 나가는 것
5. 협박
6. 녹음 및 녹화
7. 애들한테 소리 지르는 것
그의 리스트
1. 애들에게 아빠의 안 좋은 소리 하지 않기
2.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윽박지르거나 코너로 몰지 않기
3. 상황 설명을 하고 이야기하면 끝까지 들어주고 말 자르지 않기
4. 지나간 이벤트에 대해 지금 다툼에 있어 되돌아가지 않기

"야, 이건 양쪽의 무게가 너무 다른데? 아무리 말싸움하다 코너로 몰린다고 폭행과 폭언을 하냐? 할 게 있고 하면 안 되는 게 있지."

그래, 영주처럼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왜 판사는 그렇게 보지 못할까?

"뭐 정말 말로 코너로 몰았어? 뭐라고 많이 했어?"

"글쎄... 그때 생활비를 하나도 안 줘서, 돈 안주는 걸로 뭐라 했는데 그게 그렇게 느껴졌대."

영주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야, 돈 가지고 바가지 긁는 건 다른 집도 마찬가지야! 그런 걸로 그럴 거 같으면 우리 엄마도 아빠한테 20년 동안이나 돈 못 벌어온다고 맨날 잔소린데!"

영주 말이 맞았다.



굳이 적지 않아도 되는 지난 일을 적는 이유는

자주 그렇듯, 적고 잊어버리고 싶어서.

그리고 너무나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힘든 그때 상황을

직면하며 한 풀 무뎌지고 싶어서에요.

참, 힘든 시절이었네요.

무서워서, 같이 있기에 너무 큰 위협을 느껴서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면

"아이들을 두고 나간 나쁜 엄마"로 욕을 먹는 일이 반복되어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교사로서의 자아도, 엄마로서의 자아도 점점 더 무참히 부서졌으니까요.

결국 저는 남편에게 합의를 받은 후 겨우 이사해 나갔고,

별거 후에도 남편의 육아 휴직 전까지 그 지옥 같은 집으로 매일 출근해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전남편에게 한 마디 해도 될까요.

그냥 그때의 당신은 참 나빴다고, 무척이나 치사했고 돼먹지 못했다고요.

개인적인 감정을 될 수 있는 대로 다 덜어내고 보아도

당신은 천하의 개자식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너보다 더한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사람의 존엄을 깎아먹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무슨 마음인지 모르지만

다시 잘해주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때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마음이 여전히 없잖아요?

다 내가 당신을 못살게 굴어서, 그래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잘못은 하나도 없이.

지금도 따로 개선의 노력은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걸로 알아요.

그러니 어줍잖게 내 앞에서 다시 친절한 척하지 마.


아, 쓰다 보니 제게 분노의 마음이 아직도 가라앉은 빙산처럼 깊디깊게 남아있는 걸 알겠습니다.

그저 하나만 부탁할게요.

같이 살면서도 네가 한 번도 진심으로 한 적 없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사과를.

나에게 이렇게 대한 것과, 아이들을 때린 데 대하여.


당신이 정말 이렇게 하리라고는 별로 기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나도 당신을 용서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아 그래요.



그리고 이 모든 지옥과 상관없이,

오늘도 대구에서 잠을 자고 잠을 깰 우리 두 딸에게 부디 평온한 하루가 되기를.

곁에 있을 수 없는 엄마는 바라고 또 바란다. 세희야, 지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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