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독서모임의 한 동생 생일이었다.
퇴근 후 폭풍 수다 모임으로 친해진 네 명이 모여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운영진이기도 한 한 명이 자기 공간을 내어주고, 손수 미역국을 끓였다.
생일인 그 아이 덕분에 나도 실로 오랜만에 식당이 아닌 다른 데서 미역국을 먹을 수 있었다.
생일에 미역국을 먹고 케이크에 초를 키는 것.
일견 평범하지만
이걸 몇 년이나 못하다 보면
이런 소소한 축하가 결코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
그 미역국을 먹으면서
5월에 있는 내 생일날 미역국을 먹게 될지 안 먹게 될지 모르므로 '지금 내 생일 것까지 먹는다'고 여기기로 했다.
2017년 생일에는 기적처럼 임신을 하고, 잇따라 휴직을 한 후 집에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편이 몰래 준비해둔 즉석 미역국과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2018년 생일 때는 아이들이 갓 태어나 어른들 끼니는 챙길 수가 없던 시기였다.
우리는 밥때를 놓치기 일쑤였고
그런 하루하루 전쟁 가운데 생일을 챙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잠시 짬을 내어 생일 하루 전인가에
동네 미역국 집에 갔다. 내가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은 먹지 않겠다고 했다.
‘배가 고프지 않을 리가 없었을 텐데...’
싶었다.
한 술 한 술 밥과 국을 입으로 가져가는 내 모습을 보는 그의 눈에 '경멸'이라는 감정이 묻어났다.
그래서 도저히 채 다 마지막까지 먹을 수가 없었다.
2019년 생일 때는
노동절과 어린이날이 낀 5일 간의 연휴였는데
남편이 둘째만 데리고 시댁으로 가버렸다.
긴 연휴 동안 남편과 둘이 붙어 있을 생각에,
그리고 그 사이 언제든 남편이 ‘최소 한 번 이상은 폭발하겠구나’라는 생각에 갑갑해져
아침부터 와인을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그 해 3월에 돈이 없어서 내 의지에 반해 '돈을 벌러' 복직했을 때였다.
한 시간 반을 걸려 가야 하는 먼 학교 때문에도 힘든데,
아이들은 겨우 세 살.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갑자기 지희만 데리고 가는 바람에
남은 세희와 나는 어떻게든 둘이 며칠을 보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술에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를 두고
세희를 남겨놓고 떠나버린 건 애초에 죽겠다며 술을 마신 내 잘못이 물론 크지만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책임감 없는 행동이었다.
특히 세희에게는 그래선 안됐다. 아직 기저귀를 차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세 살배기였으니까.
그가 떠난 다음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다.
‘설마 내 생일을 앞두고 다시 돌아오겠지.’ 했지만 헛된 기대였다.
평소 가뜩이나 아빠를 잘 찾는 세희를 데리고 동네의 한 레스토랑에 갔지만, 세 살 아이와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 '생일'이 뭔지도 모르는 세희에게
"세희야, 오늘 엄마 생일이야."
라고 되내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나는 그 말을 하며 많이 슬펐다.
2020년 생일은
당시 상담이 그래도 효과가 있긴 있었는지
생활비를 한 푼도 주지 않던 남편이
성과급을 받았다며 4월 말에 돈을 좀 부쳐주었다.
원래는 가방을 사준다고 했는데
생활비도 근근한 사정에 가방은 안될 말이었다.
“가방은 됐고, 돈으로 부쳐 줘.”
그래서 당연히 생일 당일에는 미역국이나 케이크 같은 걸 챙겨줄 줄 알았지만,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토요일인가 일요일이었는데
점심 먹을 때까지 아무 기미가 없었다.
케이크도, 미역국도...
아이들 낮잠을 재우기 전 그만 말해버렸다.
"지희야, 오늘이 엄마 생일이야."
생일 얘기하며 돈까지 부쳐줘 놓고는
정작 그날을 잊어버리는 남자라니.
차라리 이전에도 내 생일을 단 한 번도 챙겨준 적이 없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크게 실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연애시절부터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매 스승의 날마다 학교로 보내주었던 꽃바구니,
첫 데이트 때부터 회사 근처 단골 꽃집에 들러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간간이 건네주던 꽃다발,
시사에 관심 있는 내게 나름 사려깊은 선물이라고 구독해준 르몽드지,
그리고 잊지 않고 챙겨주어 늘 고마웠던 생일...
그렇게 잘 챙겨주었던 모든 시절이 거꾸로 돌아와
'이제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내게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최근 개봉한 스파이더맨을 보면, 스파이더맨의 여자 친구 MJ가 이런 말을 한다.
실망할 걸 예상하면 실망할 일이 없어.
너무 오랫동안 생일을 평범하게 보내지 못한 걸까?
당연히 올해도 미역국을 먹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C와 함께 있는 단톡방에 이 얘기를 했더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전화가 왔다. 괜찮냐며.
그런데 나는 뭐가 괜찮냐고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실망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