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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r 01. 2022

개학을 앞두고

 처음 육십 개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이던 교실 앞에 섰을 때 나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여중, 여고를 나온 데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공부만 했던 내 심장은 아이들 앞에 서자 터질 것처럼 방망이 쳤다. 마치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열세 살 아이들 앞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서서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 연습이 더 필요하구나.'

 고등학교 같아 싫던 교대를 '열심히 다녀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그 후 등한시하던 학교 수업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제일 싫어하던 체육시간도 열심히 임했다. '과연 이게 필요할까?' 싶은 물구나무서기도 부지런히 연습했다. 리코더 연주도, 장구 치기도 모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C 밭이던 성적에서 3학년 말엔 장학금도 타게 되었다.

 그리고 교생 실습을 거듭해 가면서는 이전보다 아이들 앞에 서는 게 덜 불편해져 갔다.



 

 개학을 앞두고

 첫 발령지에서 뵌 교감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나는 그 학교에 3년 만에 발령 온 신규 교사였다고 한다.

 의도치 않게 나는 정말 오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5월에 발령을 받자마자 대단히 과중한 일을 시켜 학교가 부려먹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보다는 아무 노력 없이 과분한 친절과 사랑을 받았다.

 준비되지 않은 애정에 나는 어리둥절했고, 그것이 과분하다는 것조차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당시에는 선생님들끼리 퇴근하고 술을 한 잔 하거나 때로 멀리까지 놀러도 자주 갔다. 명목은 '우리 학교에 신규 선생님이 와서'였다. 어떤 날은 일산 호수공원까지 체육부장님 차를 타고 가서 선생님 넷이서 네발 자전거를 탄 후 어둑해져서야 밥을 먹기도 했다.

 그런 환대가 어느 정도로 특별한 것인지 그때의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교감선생님도 그랬다.

 발령 날짜인 스승의 날 하루 전에 임명장을 받으러 교육청에 갔다. 공식적인 자리라고 생각하고 그 전 해에 졸업 사진을 찍을 때 공들여 골라 산 금빛 투피스 정장을 입었다.

 그런데 학기 중간 발령이라 그날 발령받은 교사가 나 말고 딱 한 명뿐인지라 임명장 전달이 굉장히 간단하게 끝났다.

 마치고 났더니 그 학교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선생님 중 한 분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그날은 다른 학교와 배구 대회가 있어서 앞으로 내가 출근할 학교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우리 학교도 아닌 다른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정장을 입은 채 박수를 쳤다. 실은 어느 쪽이 우리 편인지도 모르는 채로.


 배구 대회가 끝나고 회식 자리에서 겨우 정말 인사를 드리게 된 교감 선생님은 40대로 굉장히 젊으셨다.

 당시 얼마 전 상처하시고 술을 자주 드셨는데, 당시에 정말 자주 회식을 같이 했었다. 선생님들 여럿이서.

 첫날 다른 선생님이 나를 2차 자리에 데리고 가려고 하자,

 교감선생님이 "오늘은 집에 빨리 가라"고 보내주셨다.


 교감선생님이 나를 예뻐해 주시는 건 다양한 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괜한 혈기에 영어 교과 워크북을 만든다고 했을 때도 허락해주셨고,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대학원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관련 법령을 따지기 전에 먼저 구두로 알겠다고 해주셨다.

 늘 유머가 넘치고 젊으셨던, 스스럼없으셨던 교감선생님 덕분에 나는 교무실에 어렵지 않게 느껴졌고, 그러다 보니 스물네 살 신규 주제에 다른 선생님들께 너무 편하게 대해 가끔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던 걸 몰랐을 뿐, 돌아보니 이제는 또렷이 보인다.

 나는 내가 준비되어 있던 것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우연히 웨스앤더슨’전에서 찍어왔어요

 얼마 전에 우연히 페이스북에 들어갈 일이 있었다.

 예전에 한 포스팅을 주욱 내려보면서

 결혼 생활 동안 실은 지금 생각보다 훨씬 행복했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나를 그는 얼르고 달래 가며 사랑해주었다.


 내 걸 본 김에 그의 페이스북 계정에도 오랜만에 들어가 보았다.

 그도 더 이상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지 예전 포스팅이 다 남아 있었다.

 아직도 나를 처음 만난 날에 남겨놓은 포스팅 문구가 가슴이 아팠다.

 - short visiting huge gaining


 사귀자게 되자마자 '연애 중'으로 바뀐 그의 프로필을 보며 나는 얼마나 기뻤었던가.

 그에 비해 내 프로필이 '연애 중'으로 바뀐 건 그로부터 수 개월 후였다.

 나는 늘 조심스러웠고, '이것이 맞는가?' 생각했고,

 결혼 약속을 한 후에도 마음이 자주 흔들렸다.


 배에서 만나 시작한 연애답게 다닌 곳도 어찌나 많은지.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일 년에 한두번은 꼭 해외여행을 다녔다.

 크리스마스마다 가던 보나세라도 포스팅되어있었다.

 빨간 원피스 입고 갔더니 주방에서 특별히 디저트를 내어 주었던 기억도 난다.

 계획이 틀어지면 불같이 화내던 나.

 하고 싶은 건 뭐든 될 수 있는 대로 하게 해 주려던 배려.

 신이 나서 재미를 붙인 요리. 가끔 아침으로 해주던 스크램블드 에그.

 때로 혼자 있을 수 있어서 고마웠던 시간.

 포스팅을 주르르 내려 보며 스치듯 지나간다.


 갈등이 있을 때 말로 풀지 못하고 손을 올리는 걸 빼면

 ... 그건 정말 뺄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지만

 아이가 없을 땐 그나마 그렇게 넘어가며

 행복하기도 했었다 싶다.


 누구를 다시 만나도 이 정도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결혼 생활이었다.

 '너의 폭력성이 모든 걸 망쳤다'라고 결론지으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제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결혼까지 해서 지냈던 지난 10년을 담담히 되돌아보려는 것뿐.

 


 조금 더 편해지면 그에게 직접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나와 사느라 당신도 수고했다고.

 나를 많이 사랑해주어서, 내 모든 변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곁에 있어 주어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기도 했었다고.

 나도 원래는,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었었다고.

 ... 그래서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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