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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r 15. 2022

지나치게 똑똑했던 아이

 격리 6일 차. 집에 머물다 보니 예전 일이 자꾸 떠올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올해 내가 맡은 아이들은 3학년. 아직 아이 티가 많이 나는 게 작년 4학년과는 많이 다르다. 1년 차이인데도.

 내가 이 아이들보다도 어렸을 때, 그러니까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렇게나 작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말한 뒤 방문을 닫아 놓으면 엄마는 내가 정말 조용히 혼자 책을 펴서 공부할 줄로 아셨을까. 당시에는 2학년도 중간, 기말 시험이 있었다.

 '시험'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르는 아홉 살, 엄마가 공부하라고 문을 닫고 나가자 아이는 신이 났다. 책상 위 높은 곳에 있던 색종이를 박스에서 꺼내 가위질을 시작했다. 혼자서 1인 2역으로 인형놀이도 했다. 금발의 바비인형과 조금은 어색하게 생긴 싸구려 마론 인형을 한참 가지고 노는데 엄마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번에 올백 맞으면 엄마가 인형의 집 사줄게."

 그제야 슬기로운 생활, 바른생활, 즐거운 생활 책을 펴 본다. 그런데 어라? 공부할 내용이 없다. 너무 기본적인 내용 뿐이다. 나는 다시 인형놀이와 색종이 가지고 놀기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시험은 너무 쉬웠고 운 좋게 올백을 맞았다.

 그때 내 모든 학창 시절을 통틀어 엄마가 가장 기뻐했던 것 같다. 동시에 모든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나는 당연히, 돌아오는 어린이날이나 그전에 있는 내 생일에 인형의 집을 선물로 받게 될 거란 믿었다.


 "자, 예쁘지?"

 하지만 돌아온 건 아빠가 근무하던 직장 상사의 딸이 갖고 놀던 중고 마론 인형 몇 개였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낙서가 군데군데 되어있는 마론 인형은, 집안 살림이 어떻고 저떻다는 엄마의 말로 넘어가기엔 어린 마음에 너무 큰 상처였다.

 당연히 지켜질 거라 생각했던 약속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깨어졌지만, 화를 내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우리 집 애들은 너무 순해요."

 라는 자랑을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던 엄마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실망감은 너무 깊었던 나머지 삼십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 거겠지. 엄마는 애초에 '올백'이라는 자랑거리가 너무 탐나 어린 나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 셈이다.

 자신은 약속을 지키지 못해 놓고, 바라는 이상은 점점 높아졌다.

 한 번 올백을 맞은 딸은 그다음 올백을 맞지 못하면

 "왜 그래? 실수했어? 실수한 거지?"

 라는 채근을 받아야 했다.

 엄마의 감시는 점점 심해져 집으로 친구가 찾아오는 일까지 하지 못하게 했다.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작은 선물을 들고 오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세 번째인가 왔을 때,

 "OO야, 선물 안 사 와도 돼. 그리고 이제 서로 공부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

 앞으로 오지 말라는 소리였다. 우린 겨우 3학년인가 그랬는데. 그 친구는 그 후 다시는 집에 놀러 오지 않았다. 나와 사이가 멀어진 건 말할 것도 없다.

 "우리 OO이 공부해야 하니까 전화하지 말아 줄래?"

 친구와의 통화도 당연히 '공부를 위해서' 하면 안 되는 일이 되었다. 내가 그 집에서 공부 말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시각각 공부를 하나 안 하나 내 방 뒤편 베란다를 일부러 오가며 창문을 통해 감시를 하던 그 눈초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그저 카니발에서 쇼를 담당하던 기인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갇혀있는.


 나는 점점 반항심이 생겼다. 떨어져 가는 성적을 두고 엄마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한다."

 는 말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치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한 아이큐 검사에서 월등한 수치를 받았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따로 전화를 할 정도로.


 중 1 때 처음 전교 10등 안에 들고 와서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엄마, 나 잘했지?"

 라고 물었을 때

 '네가 그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하던 싸늘한 표정을 기억한다.

 "엄마, 나 이화여대 정도는 갈 수 있겠지?"

 나는 그저, 칭찬 한 마디가 필요했는데. 엄마의 눈치를 보며 겨우 뱉은 이 질문에 엄마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렇게 나는 공부하는 기계가 되었다. 별로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이런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착취를 당하면서도 막상 내 생일은 식구 중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일 년 새 발이 얼마나 자랐는지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친구를 만나지 않다 보니 교복 말고는 밖에 입고 나갈 변변한 옷이 없어서

 봄소풍 때는 남동생 옷을 입고 가기도 했다.

 밥과 간식은 먹고 힘을 내서 공부를 하기 위한 연료였고

 제대로 먹지 않는다고 부모님은 늘 화를 내었다.

 나는 먹고 싶지 않았다. 소화도 안되었다.

 공부 외에 다른 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부모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쇼윈도에 걸린 가방 같은 삶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든 명품 가방이었다.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남들을 볼 때마다 자랑하는.

 부모님은 키는 얼마나 컸는지 챙겼다. 다른 집 아이들보다 작은 건 못 참아했다. 다른 집 아이보다 공부를 잘하고, 키가 크고.

 그러면 되었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부모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서 쓰는 건 아니다.

 이제껏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소위 전문가라는 분들에게 수많은 상담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제대로 정리를 해주지 못했다. 부모님은 나이가 드셨고 이야기해 보았자 바뀌지 않기에 내가 이해하라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

 부모님이

 "내가 못한 공부를 네가 너무 잘하길래.",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지."

 라는 변명을 이제와 하셔도, 과거에 존재했던 그 오랜 세월이 바뀌진 않는다.

 당시 나는 어려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지 정확히 모르는 채 부모님에 대한 엄청난 반감을 날로 키워갔다.

 집 전화번호부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어머나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저는 떠납니다'

 란 글이 한쪽 페이지에 그어진 줄을 무시하고 커다랗게 적혀있다. 아마 겨우 한글을 깨쳤을 때 적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아닌 동생이 적은 걸지도 모른다.

 매일 공부를 하는 내 모습이 너무도 당연했는지 수능이 끝나고 나서 밤새 당시 유행하던 세이클럽 채팅에 한참 빠져있는데 아빠가 다가와서

 "지금 뭐 하냐?"

 고 물으셨다.

 나는 수능이 끝나서 놀고 있는 중이라고 했는데, 그마저도 용납이 안되나 보았다. 수능이 끝났으면 논술을 준비하라고 했었던가, 뭐 그 비슷한 말을 하며 화를 내셨다.

 그 날은 겨우 수능 다음 날이었는데.

 그래서 서울로 대학을 올라가면서는 동생에게 다시는 집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유년기를 보내고 시간이 흘러 어느새 마흔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응당 했어야  여러 과업을 하지 못한  어른이 되다 보니 지금도 가끔  안의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같은 기분이  때가 있다.

 누가 조금만 내 마음을 알아주어도 쉽게 마음이 움직인다. 최초의 가족이 그걸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다 그 사람도 내 원가족처럼 나를 착취할까 겁이 나면 다시 나의 단단한 껍질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단절하려 든다.

 그래서 앞으로 새로 짓게 될 관계에서 잘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늘 마음에 이고 산다.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건

 어쩌면 저주였던 것 같다.

 차라리 좀 모자랐으면

 평범하게 자랄 수 있었을까.


 삼십 년도 더 된 일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이 자체가

 그다지 스스로에게 좋은 일이 아님을 안다.

 언제쯤 그 시절을 놓아줄 수 있을까.

 첫 단추부터 뒤틀린 지나간 시절을 처음부터 다시 바로잡을 수 없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른이 된 후 ‘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했는데

 막상 자유를 찾고 보니

 어렸을 적 만들어져야했던 ‘나’라는 사람 자체가 없었달까. 자라지 못했달까. 알 수 없었달까.

 앞으로는 이전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전의 이 시간에 대해 무언가 해야할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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