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희 Apr 03. 2022

비극의 한 막이 내리고

 지난 금요일에 두 번째 변론기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양쪽에서 서면이 오갔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고, 별로 증거가 될 것 같지도 않은 카카오톡 대화를 증거랍시고 첨부해놓았다. 면접 교섭에 늦어 짜증 나는 마음을 친구한테 톡을 보낸다는 게 그 인간한테 보낸 적이 있는데, 그걸 캡춰해서 법원에 제출했다. 내가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그걸로 굳이 증명해 보이고 싶은 걸까? 뭐에 대한 증거로 그걸 쓰겠다는 건지, 보면서

 ‘넌 고작 이렇게 할 정도로 참 할 말이 없구나.’

 싶었다.


 지지난 주 하마터면 열차를 한 번 놓칠 뻔해서 오늘은 좀 더 서둘러 나왔다. 우리 동네는 어떨 땐 정말 지독히도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다행히 오늘은 금방 잡혔다. 그런데 10분이 넘는 거리에서 출발하는 모양이었다. 집을 일찍 나선 덕택에 그래도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쳐다본 스마트 폰 창에 뜬 기사님 사진이 유독 나이가 들어 보였다. 물론 대부분의 택시 기사님은 연세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양옆으로 가늘게 남은 흰머리와 뚜렷한 이마 주름이 특히 눈에 띄었다.

 

 전화를 걸어 아파트 정문에 서 있겠다는 말씀을 도착 조금 전에 전화로 드렸다. 반가운 마음으로 뒷좌석 문을 열고 인사를 드리자,

 “어이구, 늦어서 죄송해요.”

 라고 하신다.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걸 알고 기다린 거라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너무 많은 나이 차 때문이었을까? 사과를 받는 내 마음이 오히려 죄송했다.

 “여기는 ㅇㅇ인가요?”

 “네.”

 “어, 근데 금방 조금만 가면 여기가 나오네.”

 지금 사는 집이 서울과 무척 가깝다는 말씀이셨다. 목소리가 일반 사람보다 1.5배 정도 크신 걸 보니 귀가 좋지 않으신 게 분명했다.

 “참 서울과 가깝고. 살기 좋단 말이죠. 거기는 일반 분양했어요?”

 “네. 운이 좋았죠.”

 그리고 기사님은 평당 분양가를 물으셨다.

 “삼천 이하였어요?”

 “삼천... 아니오 이천 이하였어요.”

 정확한 액수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고자 한 번 정정한 끝에 그 숫자를 말씀드렸더니 많이 놀라시는 눈치였다.

 “와, 그럼 정말 쌌네요. 지금 그 돈이면 거기 전세도 못 들어갈 텐데.”

 “맞아요. 주변 오피스텔 살 돈밖에 안돼요.”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 전에도 아파트 사셨을 거 아니에요?”

 “네, 맞아요. 그 전에는 근처 ㅇㅇ에 아파트 살았어요.”

 “그럼 거기 나올 때 양도세 많이 주셨겠네요?”

 나는 이전 집을 매매할 때 세금을 얼마나 물었는지 모른다. 아마 2년이 지나서 팔았기 때문에 양도세가 없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기사님은 연신 칭찬이셨다.

 “어이구, 너무 잘하셨네.”

 재테크를 잘했다는 의미였다.

 ‘그 집 전세금은 현재 가압류돼있는데...’

 택시는 어느덧 가락시장을 지나 있었다.

 “그때 생활비가 없어서... 애들도 어린데 복직을 해서... 또 애들도 둘이 거든요, 쌍둥이. 그때 직장을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데... 안 갈 수도 없고 애들도 어리고, 진짜 힘들었어요.”

 잠자코 있으려던 내가 갑자기 봇물 터지듯이 말을 시작했다. 곧 수서에 도착하는데, 남은 시간이 아쉬워졌다.

 “그럴 땐 누가 도와줘야 하는데...”

 “친정, 시댁 다 멀리 있어서...”

 “어딘데요?”

 “경상도요. 김해랑 대구요.”

 “남편이 대구 사람이에요? 나도 대구 사람인데! 나도 대구 사람이지만 대구 남자, 좀 그렇죠? 자기 말이 다 맞고, 가부장적이고.”

 나는 거기에 동의하며 이혼 소송 중임을 실토했다. 그리고 이혼 사유에 대해서도.

 “네? 뭐라고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시던 기사님은 남편의 폭력성에 대해 들으시고는

 “질이 나쁘네요.”

 라고 말씀하셨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시작할 때 살던 집을 비우고 나왔는데 바로 시댁으로 데려가 계속 보여주지 않았던 이야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동대구역에 아이들 보러 가요.”




 “연애결혼했어요?”

 “네.”

 “근데 몰랐어요?”

  자주 듣는 질문이었다. 심지어 상담사한테서도. 그걸 미리 알았다면 누가 그런 사람이랑 결혼할까?

 “손찌검하는 남자들이 다 그렇대요. 결혼하고 나면 본색을 드러낸대요. 남편도 결혼하고 몇 달 지나서부터 딱 그러더라고요.”

 그간 가정 폭력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책을 읽고 공부한 보람이 이럴 때 있다.


 “손님, 제 나이가 지금 일흔 넷입니다. 살 만큼 살며 이것저것 다 보았어요.”

 칠순 중반의 귀가 잘 안 들리는 대구 출신의 그 기사님은 갑자기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하셨다.

 “아이들은, 아이들은... 데려오지 마세요. 그쪽에서 키우라고 하세요. 그게 손님을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같은 내용의 말을 내가 끼어들 틈 없이 힘주어 강조하셨다.

 “지금 아이들 못 키우는 마음이 너무 애달프겠지만, 그래도 저쪽에서 키우라고 하세요. 그리고 손님은 새 출발하세요.”

 “안 그래도 법원은 보통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대요. 남편은 양육비 가지고 난리고요.”

 “그런 사람은, 손님이 아이 키우면 양육비 안 줍니다. 그런 사람이에요.”

 너무 안됐다고 안쓰러워하시는 기사님 앞에서, 그래도 나는 이런 얘기를 반쯤 웃어가며 했나보았다.

 “손님은 웃지만, 저는 너무 안됐네요.”

 택시는 이미 수서역 하차 승강장에 도착한 후였다. 기사님의 마지막 말을 듣고 나서야 내 이혼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자꾸 아이들을 저쪽에서 키우라고 하는 말에 결국 눈물이 나왔다.




 소송을 시작한 지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는 그의 뻔뻔함 앞에 그렇다면 나도 용서할 마음을 거두고 싶다. 나의 이런 상황을 잘 알면서 이제 와 갑자기 빚을 내서라도 굿을 하라고 권하는 신당에도 거부감이 든다. 나는, 괜찮다. 이제는 웃으며 모든 지난 일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앞으로 또 힘들어져도 괜찮다.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다.

 지나간 시간만큼 힘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그 고비를 이미 넘겼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때로 힘들겠지. 하지만 지나온 날보다 더 나쁜 일이 또 생기랴. 그 깜깜한 진흙탕도 맨몸으로 다 걸어온 내가 세상에서 가지 못할 길은 없다.


 나는 스스로 밧줄을 끊고 바다로 나온 배다. 군데군데 녹슬었을지언정, 드넓은 대양을 항해하고 새로운 육지를 발견할 힘이 있다. 그런 내게 날씨는 탓할 만한 것이 아니다. 전남편이 계속 세찬 비바람을 뿌리며 고집을 부려대도, 그것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저 나는 다시 잘 살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새삼 기억해 낸 것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성과급의 계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