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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y 31. 2022

속옷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 영화 '중경삼림' 중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를 믿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생일이 유통기한인 통조림을 모으며 읊조린다. 최근 리마스터링 되어 다시 개봉한 이 왕가위 초기작을 얼마 전 극장에서 감상했다. 주인공은 사랑에 유통기한을 만 년으로 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던 걸까? 그런데 비단 사랑에만 만 년의 유통기한이 있었으면 하는 건 아니다.




 어느덧 더워진 날씨 때문에 시원한 게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교실 내 자리 찬장에서 작년에 사둔 레모네이드 가루를 꺼냈다.

 "선생님, 뭐 드시는 거예요?"

 "어, 레모네이드."

 "저도 먹고 싶어요. 저도 주세요."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결국 텀블러에 담아 교실에 갖고올 수 있는 음료 종류를 물 이외에 몇 가지 더 허용해주었다. 집에 돌아와 이 레모네이드 스틱을 몇 개를 더 챙겨가려고 보니 유통기한이 작년 10월 26일이었다. 아무리 가루라지만 유통기한이 6개월이나 지난 걸 먹자니 찜찜해서 절반 이상은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약통 사이로 입 안 상처에 바를 오라메디를 찾다 뜯지도 않은 스멕타 한 통을 발견했다. 역시 유통기한이 1년 넘게 지나있었다. 아마도 아이들을 키우던 2년 전쯤, 하도 자주 중이염이 걸려 항생제를 먹이다 보니 그에 따른 설사를 줄이기 위해 약국에서 통째 한 통 샀나 보았다. 약이 담긴 종이곽을 보자 그걸 샀을 것 같은 약국의 위치와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날도 소아과를 갔다 처방약을 타며 미리 쟁여놓겠다고 사놓고선 그 후로 영영 뜯을 일이 없어진 것이었으리라. 그날 그때까지 높은 곳 한 켠에 고이 모셔져 있던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1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약효가 없을까?'

 라고 자문해보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많은 양의 정장제는 필요할 일이 없으리라는 판단이 다시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설사 앞으로 1년 넘게 유통기한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 한 통의 스멕타는 이제 영영 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밀봉 스티커도 떼지 못한 채 주인 없이 버려질 운명이라고는 그 스스로도 미처 알지 못했으리라.




 인터넷 마트에서 새로 시킨 면 팬티 세트를 며칠 전 처음 세탁했다. 건조기에서 꺼내며 흰 속옷의 새하얌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제 오래 입어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오래된 속옷은 묵묵히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빨아도 처음처럼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다. 누구나 세월에 얼룩진 다양한 흔적을 저마다 조금씩 안고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아무런 티 하나 없는 깨끗한 새것을 보면 절로 눈이 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어쩌면 결혼 생활도, 삶 자체도 그런 것인지 몰랐다. 나의 허물과 그로 인한 과거를 미처 다 지우지 못한 채 안고 조금씩 낡아가는 것. 그것을 견딜 수 없다면 결혼 생활도, 삶도 지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유난히 그런 얼룩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새 속옷을 입는 게 처음도 아닌데 두근대는 마음으로 시착을 했다. 그런데 그만 피식 웃음이 났다. 나이가 들며 살이 붙은 골반을 과소평가했나 보았다.   

 '다음에는 한 치수 크게 사야 되겠어.'

 희고 깨끗한  팬티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잠시  깨끗한 외모에  빼앗겼던 정신이 들며 현실로 돌아온다. 너무  맞긴 해도 어찌어찌 참으며 나는 다시  속옷을 낡아가게  것이다. 어쩌면 이번 여름에 운동으로  살을 빼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의 삶은 그렇게 새로움과 편안함, 새것과   사이에서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조금씩  것으로 보내는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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