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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y 13. 2022

내가 싫어지는 날

 시작은 뭐였을까? 몇 번째인지 이제 세기도 힘든 변론 기일이었을까, 첫 발령을 받은 후 16년째인 스승의 날이었을까. 어제 모인 글쓰기 모임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어느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소름 돋는 자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연히 이길 거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이혼은 전남편과 살았던 시간만큼 생채기를 내었다.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선고되든, 나는 인생을 건 사랑에 크게 실패한 셈이었다. 목숨을 건 탈출이기도 했으나 그 과정에서 나는 너무 오만했다.

 



 어제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의 첫 정모가 있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너무 많은 사람들, 전부 다 처음 보는 사이에 어떤 주제를 골라 이야기해야 할지 너무 어려웠다. 모임장 분께서 주말에는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이야기, 그날도 집에 가서 빨래를 개야 하지만 아이들이 있기에 살아간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끄럽게도 강한 질투를 느꼈다. 옆에서 봉순이라는 강아지를 키우는 분이

 “강아지를 키우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닌데...”

 하며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이어 중성화 수술을 시킨 후 강아지가 낑낑댈 때마다 밤새 함께 뒤척댔다고 하셨다. 나는 과거 쌍둥이의 엄마이면서도 아이가 아플 때 ‘제발 자줬으면’하고 바랬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잠에 취약한 나는 그렇게 전남편에게 ‘엄마’가 어떻게 그러냐는 비난을 수시로 들었다.

 내가 그렇게 잠이 많은 사람인 것을 어찌하지 못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사실 자체가 많이 싫다. 동시에 아이들이 없는 내 삶의 모습이 여느 혼자 사는 여자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도 반갑지가 않다.

 “결혼, 안 하셨죠?”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에 억지로 태연한 척 하며 답했다.

 “한 번 했었어요.”

 

 그렇다면 난 이제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딱히 없었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살고 있을 뿐. 대단한 희망도, 인생을 걸만한 무언가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내 스스로가, 그간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싫어졌다. 잇따라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비뚤게 보였다. 말대답하는 맨 앞자리 학생, 자기 온라인 수업 시간조차 챙기지 못하면서 인생을 논하는 친구, 사사건건 불만을 토로하는 동료 선생님, 데이팅 프로그램을 즐겨본다는 한가해 빠진 사람들. 모두 다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는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이 괜스레 든다. 동시에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나란 사람은 다시 사랑에 빠졌는가 하는 불가사의함도 같이 느낀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현 상황에 대한, 그리고 미치도록 남자를 증오해 놓고 또다시 같은 짓을 반복하는 스스로에 대한 신물또한 같이.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정도로 겉보기에 괜찮아도,  제자들의 사랑을 받는 선생님이어도, 스스로 쓰다듬어주지는 못할 망정 쳐다보기도 싫은 나는  문제다. 모든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인생의 진리 아닌가? 내가 갖고 태어난 모습 그대로를 조금  둥글고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만족하는 삶을   있다. 이젠  사실을 안다. 하지만 급격히 쪼그라든 마음은  세상과 나와 다른 이들을 계속 증오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평생에 걸쳐  얇았던 발목조차 오늘은 나약해 이기만 한.


 이런 밤에 필요한 건 몇 잔의 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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