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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Jun 02. 2022

유월

 그는 내가 좀 더 능동적이길 원했다.

 하지만 최근에 한 문장완성검사에서

 결혼생활에 대한 나의 생각은

 뒤에

 다시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

 라고 빈칸을 채운 나로서는

 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불쑥불쑥 아직도 어떤 트리거로 인해

 전남편의 어두운 그림자가 끄집어내지기도 했었기에 더욱 누군가를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대견한 날들이었다.

 



 눈부신 유월의 첫날이었다.

 ‘이런 날 그 레스토랑을 가면 어떨까.’

  생각이 들지만 이전에 벌써  번이나 말한 터라  조르지 않기로 한다. 집에서 차로 20 거리의 새로 생긴 프렌치 레스토랑. 6 초까지 콜키지 프리인데다 음식과 인테리어가  괜찮아 보여 가봤으면 했는데, 아마 이번에는 어렵겠다.

 그가 좋은 곳에 나를 데리고 갔으면 하는 마음과

 그걸 조르지 못하는 소심함이

 겉보기에 우리 관계를 평온하게 만들고 있다.

 거기에는 작은 것에도 고마워하려는 의식적인 노력과, 평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내 기질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너도 알고 보면 별 수 없는 똑같은 놈이겠지.’

 라는 무의식이 있었다.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예쁘게 머리와 화장을 하고, 그와 약속 시간이 조금 남은 동안 쉐이크쉑에 들렀다. 다 먹기 버거울 만큼의 음식을 시켰다. ‘언제 또 여기 들러 먹겠냐’는 생각으로. 큰 통유리 창밖 강남 거리엔 손잡은 연인들이 참 많이도 지나다녔다.

 버거를 끝내고 프라이를 몇 점 먹으니 아니나 다를까 배가 너무 불렀다.

 지금 내가 휴일에 뭘 하고 있나 싶은 생각과 함께

 차라리 그가 나를 버렸으면 했다.

 서로 중요한 무언가가 되기 전에, 이제껏 그가 숱하게 만나고 헤어졌을 그런 평범한 짧은 연애에 나를 묻어버리고 싶었다. 그와 매일 통화를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는 일이 힘에 부치는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아직 누군가를 제대로 다시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채 다 지나가지 못한 불행을 질겅질겅 씹으며 희망을 희망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그간 나름 편안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 곁을 지킨 이 어둡고 축축한 편안함을 뒤로한 채 햇빛이 쨍하게 비추는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 햇빛은 너무 눈부신 나머지 주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 모든 걸 뒤로하고 나를 깨워 만난 걸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가 땅을 치고 후회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가 나를 버리고 가줬으면 했다.

 그리고는 돌연 그가 내 삶에서 없어진대도, 고개 한 번 흔든 채 다시 내 갈 길을 갈 수 있는 정도로만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해 본다.

 예쁘게 보이려 아이롱으로 c컬과 s컬을 번갈아 넣은 머리와 특히 눈썹에 공들인 화장에 참 안 어울리는 생각이었다.


 어느덧 유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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