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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Aug 16. 2022

푸껫에서의 크리스마스

 요즘 아침 세수를 할 때마다 십 년 전에 푸껫에서 만난 가이드 언니가 생각난다. 3박 5일 푸껫으로 반자유 패키지를 갔을 때 잠깐 본 것 말고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참 이상하다. 12월 31일 저녁에 나와 당시 남자 친구를 레스토랑에 남겨두고

 "저도 그럼 이만 제 남편 만나러 가볼게요."

 라며 일어서던 그 마지막 뒷모습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언니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크고 동그란 서글서글한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유난히 작은 키만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다. 한국에서 아가방을 다니다가 무엇에 질렸는지 회사를 그만두고 태국으로 왔다고 했다.

 당시 나는 외국계 제약회사를 다니던 남자와 사귀고 있었고, 큰 풀이 딸린 널찍한 풀빌라로 연말 여행을 갔었다. 그의 집은 그다지 잘 사는 편이 아니었지만 연봉은 꽤 괜찮았었고, 당시 나는 대학원생이었기에 여행비를 하나도 보태지 않았다. 그가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어서 돈을 내야겠다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같이 가주기만 해도 엄청 좋아하겠지.'

 아빠는 공항에 있던 내게 전화를 거셔서 어떻게 아직 결혼도 안 한 남녀가 같이 몇 박 며칠이나 여행을 가냐고 호통을 치셨다. 이제는 사귀는 사이이면 자연스레 여행도 가고 집도 드나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럴 말을 들을 때마다 세월이 많이 변했구나 싶다.


 우리는 그냥 '놀러'를 간 거였는데, 거기를 허니문으로 온 신혼부부가 꽤 많았다. 우리는 풀빌라였는데, 그냥 호텔 객실에 완전 패키지로도 많이 왔다.

 '일생에 한 번뿐인 신혼여행이 여기라니...'

 정해진 일정에 따라가는 패키지여행을 신혼여행이랍시고 온 사람들을 보며, 나는 모종의 우월감 같은 걸 느꼈다.

 '신혼여행은 꼭 더 좋은 곳에 갈 거야.'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곁에 있었기에 나의 신혼여행은 당연히 푸껫보다 근사한 곳으로 가게될 거라 믿다.


 그렇게 새파랗고 철없는 나도 여행 중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 가이드 언니가 곁에 있었다. 한 번은 물속에서 나와 비키니 차림이 추워 몸을 떨고 있었는데 원피스처럼 입을 수 있는 간단한 튜브탑 원피스를 하나 건넸다. 돌려주어야지 생각했었는데 언니가 괜찮다고 했던가, 해서 몇 년간 집에 옷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수영복 위에 걸치는 간단한 천 같은 옷이라 그 후 실제로 어디서 입지는 못했다.

 그 언니가 남편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렇게 말했다.

 "시내에서 장사해요. 작고 볼품없는 태국 남자예요."

 그런데 그 말을 하며 의미와는 다르게 언니의 표정이 행복으로 활짝 빛나 보였다. 그래서 아마 이렇게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그녀가 기억 나는 것이리라.




 요즘 남자 친구와 별일 없이 잘 지낸다. 방학이라 시간 여유가 있어 나도 평소보다 더 잘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런가, 그가 점점 더 나를 예뻐하는 게 느껴진다. 예전 같으면 이쯤에서 이 정도는 해달라는 요구를 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처음처럼, 그래서 내일 헤어져도 하나도 후회스럽지 않고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지내려고 한다.

 하지만 욕실에서 얼굴에 물을 부딪치고 세수를 하고 나오면 떠오르는 가이드 언니의 마지막 말이

 어쩌면 나는 그런 작은 행복 따위는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애초에 너는 그런 욕심을 갖고 태어난 여자라고. 더 좋은 곳에 가고, 더 좋은 것을 먹고, 더 좋은 갖길 원하고.

 그 욕심으로 인해 나는 행복을 잃을 거라고. 아마도 언니는 그 얘기를 하기 위해 자꾸 아침마다 나를 찾아오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그 말에 크게 반대하지 못하겠다.


 당시 푸껫 풀빌라를 같이 갔던 그와는 이듬해에 헤어졌다. 그의 집이 그렇게 여유 있지 못해 신혼집을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시작해야 하는 게 영 마지막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나를 예뻐한다는 이유 말고는, 그래서 그가 지갑을 잘 연다는 이유 말고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웬만큼 다 하게 해 준다는 이유 말고는

 사실 그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바뀌었을까?

 여전히 남녀 사이종의 거래가 알게 모르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손쉽게 기 위해 상대재력에 편승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일종의 살아가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역시나 나는, 이렇듯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어렵다. 이런 계산을 깨끗이 버리지 못하는 이상 앞으로의 내 애정 전선도 맑기만 하기는 힘들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 만으로 지금 내 곁의 그에게 슬며시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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