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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Aug 29. 2022

예쁜 이별도 있을까

 만나는 동안 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던 그와 어제 헤어졌다. 아이를 낳고 결혼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말했던 그와 만나며 심각해지지 말자고 늘 다짐했었다. 이제는 그 옆자리를 비워줄 때였다.

 며칠 전 '여성가족부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툭 던진 말에 그와 절대로 오래 같이하기 힘들겠다, 아니 오래 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나와 대척점에 서 있었고, 간곡한 내 부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때때로 정치 얘기를 꺼내곤 했다. 돈이면 뭐든 살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적인 생각과 그 돈을 벌기 위해 너무 많은 신경을 쓰는 주식과 부동산 얘기도 지겨웠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듣는 날에는 어김없이 화를 내는 모습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불안한 외줄 타기 중이었다.

 결정적으로 지난 금요일에 나의 존재를 주변에 거의 알리지 않는 그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오빤 어디 나가면 보통 여자 친구 없다고 그저께처럼 말해?"

 나와 다른 사람 넷이 함께 모인 자리였는데 우리 둘 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나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고, 그는 없다고 했다. 한 술 더 나아가 그는 내게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라고까지 했다.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헤어짐 박*'이 터진 순간은.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나 끓어야 정상일 것 같지만, 이상하리만치 냉담하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내용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다는 걸 아는 오빠 친구, 있어?

 "어, 있어."

 "누구?"

 한두 번 이름을 들어본 초등학교 동창 한 명이 겨우 입에서 나왔다. 속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면 오빠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은 거지?"

 "응."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 만나도 괜찮겠네?"

 "그래야 겠... 지?"

 우리가 처음 사귀며 이야기 나눴던 그 지점에서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있었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몇 개월간 쌓아온 무언가가 정말 없었단 말인가 싶어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이제껏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한 숱한 순간들이 약간 후회됐다.

 "그런데 오빠, 나는 누구를 만나면서 다른 사람 만나는 게 안 돼.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계속 이렇게 오빠를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전화를 끊고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결론이 나왔다.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차분히 이별을 통보했다.

 "우리 둘 다에게 이게 가장 좋을 것 같아."

 우리는 그간 잘 지내준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좋은 사람 만나."

 그는 정말 나를 만나며 다른 사람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내 입장에서는 이 정도에서 그가 새로 누군가를 온전히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비워주는 게 맞았다. 그리고 이제 나도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좀 더 젊고, 나와 생각의 결이 비슷하고, 외모에 대해 바짝 긴장하지 않고 조금은 느슨해도 괜찮을 사람을.

 "아쉽네. 잘 맞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는데... 너도 잘생기고 잘 지낼 남자 친구 생기길 바래."

 세상에 만약 예쁜 이별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양일 것 같았다.

 "이제 이사 갈 테니 술 먹고 찾아갈려고 해도 못 가겠네."

 "오빠. 난 헤어지면 연락하지 않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알지. 그런데 뭐 사람 일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흘러가나."

 순간, 굉장히 이성적인 대화를 하면서 만약을 끼워 넣는 그 얄팍함이 너무 싫었다.

 "오빠 물건은 택배로 보내줄게."

 "회사로 보내줘. 카톡으로 주소 찍어줄게."

 아니, 이제 어떤 형태로든 간에 연락은 사절한다.

 "네이버에 찾으면 나오는데 뭐. 여기 맞지?"

 하며 나는 주소를 불렀다. 더 이상 카톡도 보내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그가 있어 힘든 시기를 잘 견뎠다.

 어쩌면 난 그를 적절히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내 존재를 주위에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 그리 서운하지 않다. 그리고 헤어지고 그가 얼마나 힘들지 모르겠지만, 그 점에 있어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가볍게 만나자고 한 건 그였다. 다만 예쁜 이별은 거기까지다. 돌아선 나는 그때부터 그를 잊기 위해 그와 있으면서 힘들었던 점을 생각한다. 어쩌면 다시 자유를 찾은 기분마저 든다. 나는 이혼했고, 곁에 있었던 남자도 버렸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다시 새 남자를 찾을 것이다. 절대적인 내 기준으로. 결혼과 아이를 원하는 사람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에게 맞는 여자를 찾아야 맞다. 나도 내게 맞는 사람을 찾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 결혼과 아이라는 조건은 없다.

 헤어지고 영화를 보는데 잠깐 왈칵하려던 눈물이 다시 쏙 들어갔다. 아마도 이번 이별에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다.



*헤어짐 박: '유미의 세포들'에 등장하는 가상의 박이라고 저도 들었어요. 콩주머니를 자꾸 던지면 박이 터지듯, 헤어짐 박은 마지막에 결국 사소한 일 하나로 터지고 만다고 누가 얘기해주더라고요. 너무 적절한 표현 같아 가져와서 써봤습니다. 헤어짐 박이 전부 다 벌어지기 전에 꼭 대화로 미리미리 대비를 해야하는데, 이번에는 한 오십 점 정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예 안해본 건 아니라서요.

 다음에는 더 잘하고 싶어요. 더 좋은 사람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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